옛날에 사납고 무지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왕이 있었다.
어느 날 왕은 우상이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면
그 날 제일 처음 성을 지나는 행인 세 명을 잡아
그 우상을 강제로라도 숭배토록 하리라 맹세했다.
소원이 이루어지자
왕은 즉시 병사들을 보내
처음 만난 세 명의 행인을 데려오도록 했다.
공교롭게도 그 세 사람은
학자, 사제, 창녀였다.
그들을 우상 앞에 무릎 꿇게 한 후
미친 이 왕은 자신이 한 맹세를 말하고
우상에게 절하기를 명령했다.
학자는 말했다.
"이 상황은 불가항력이고
준엄하고도 도덕적인 문책이 없다 해도,
비록 강제적이라 할지라도 관습에 따라야 한다는
수많은 선례들이 있다."
그래서 그는 우상 앞에 깊이 고개 숙여 절했다.
자신의 차례가 되자 사제는 이렇게 말했다.
"무한한 은혜를 받은 나에게는 신성한 사제의 피가 흐른다.
내 행동은 행한 모든 일을 정화시킨다.
그러므로 왕의 요구에 대한
내 행동을 제한할 것은 없다."
그리고 그는 우상 앞에 절했다.
마지막으로 창녀가 말했다.
"슬프게도, 나는 지식도 특권도 없다.
그래서 왕께서 나를 어떻게 할지 두렵지만
단지 고개를 숙이는 행위일지라도
나는 이 우상을 섬길 수 없다."
이 말을 듣자 미친 왕은
갑자기 판단력을 되찾았다.
그는 우상에게 절을 한 두 사람의 위선을 보았던 것이다.
왕은 학자와 사제를 즉시 체포하고
창녀를 자유롭게 해 주었다.
오쇼 라즈니쉬 <엇갈린 기대> 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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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생각했다.
당연히 해야 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고 무언가를 행할 때 '왜'라고 물으면서도 사실 '어떻게'를 생각하며 자기 합리화에 빠져 살았다. 그렇다면 지금 내게 있어서 내 행동 기준을 세워주는 우상은 무엇인가.
세상에는 많은 가치가 존재하고 그 가치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타인에 강제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스스로를 설득시켰던 합리적인 이유가 남에게는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사제와 학자는 자신의 가치를 준용하는 데 익숙한 부류들이다. 그래서 자기가 만들어 놓은 함정에 종종 빠진다.
나는 언론이 그렇다고 생각해왔다. 학자와 사제 처럼 가식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선례에 따르는 모습이 딱 언론인의 모습이다. 어쩌면 블로거들이 창녀 처럼 제멋대로이지만 자기 스스로를 설득시킬 무엇인가가 없다면 설득되지 않는 이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서 또 다른 모순이 있다. 창녀 처럼 완결하지 못한 인간이 우상을 섬기라는 명령에 불복했다는 이유로 깨끗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일 사건에 불과하다.
오쇼 라즈니쉬는 이런 말로 이 우화를 설명한다.
"이 이야기는 상징적이다. 물론 우화이지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이 이야기는 신 앞에서 당신의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니며, 만약 당신이 거짓된 행동을 취한다면 체포되어 먼저 불 속으로 던져지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신 앞에서는 똑바로 설 수가 없다. 거짓이 당신을 죽일 것이다. 그리고 창녀는 자유롭게 될 것이다. 진실 앞에서, 겸손에서 나오는 그 힘에서만, 순수에서 나오는 지식만이 자유로움을 주고 해방을 준다."오쇼 라즈니쉬(예전에 <배꼽>이란 책으로도 유명한 인도 철학자)는 '솔직함'이 '진실'에 가깝다고 말한다. 학자와 사제가 이렇듯 자신이 만들어 놓은 함정에 빠진 이유는 에고를 키워준 지식과 구도가 결국 가식이라는 것이다.
새해 벽두부터 대규모 가치 충돌이 있다. 이럴 때일수록 솔직해져야 한다. 서로가 '뭘 알고나 떠들어라'는 말 속에 담긴 폭력을 스스로 깨달을 필요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