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그냥 문득, 회사를 나가게 될 때 어떻게 나갔는지 생각하다가... 처음으로 해고 통지서라는 것을 받아보았던 기억이 나서 씁니다.
정황 설명은 구체적으로 하기 힘들구요.
모 회사, 외국계였죠.
어느 날 사장이 그만을 부릅니다. 입사한 지 불과 3개월 좀 지났을 때였죠.
그리고 하얀 봉투를 하나 내밉니다.
그 봉투가 무엇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 전주부터 시작된 사람 내보내기의 끝이 제 차례였으니까요.
알고 있으면서도 그 봉투를 받아 들었을 때는 묘한 감정, 그리고 복잡한 생각들...
사실 그 봉투도, 제가 만들라고 종용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죠. 전 주에 해고 대상이었던 사람들에게 노동법에 대해 이야기해주면서 해고통지는 사실 서면이 아니더라도 구두로 할 수 있지만 이의신청을 낼 수 있고 구두 해고통지에 대해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노동자라면 갖고 있다고 말했죠.(지금은 서면으로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생겼습니다만 ^^)
해고 대상자는 사장실로 불려들어가 해고통지를 받았으나 사장에게 '서면으로 달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기가 막힌 것은 그 다음날 급하게 작성한 '해고통지서'를 그들에게 배포한 신속성이었습니다. 허헛. 그것도 그만이 이미 인터넷으로 봤던 그 서식 그대로.
그 서식에 이름만 바뀐 채 내게 봉투에 담겨 넘어 온 거죠.
기가 막혔습니다. 아니 어쩌면 난 해고통지보다는 사직을 권고하는 온유한 문장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는지도 모르죠.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 사장을 앞에 두고 화를 냈습니다. 어찌 이럴 수 있냐고. 일도 제대로 할 수 있는 시간도 주지도 않고 이렇게 부당하게 사람을 내보내면 어떻게 하냐고.
속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온통 뒤죽박죽이었죠. 이성적이고 차가운 음성으로 시작된 항의는 결국 큰 목소리와 문을 쾅하고 닫는 소음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고 나서 문 밖을 나가 씩씩 거리며 있다 보니... 그 사장님이 어찌나 측은하던지요. 왜 그는 나같은 풋내기에게 심한 말을 듣고 같이 언성을 높였어야 했는지 얼마나 스스로 비참했을까요. 해고통지서를 주고 받던 우리는 그렇게 서로 불쌍했습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당시를 다시 기억해봅니다.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반드시 이런 수모에 대해 복수하고 말겠다는 생각도 들었다가, 얼마나 절박했으면 사람을 뽑았다가 몇 개월 지나지도 않고 내보내야 했을까 안타까운 생각도 들었죠.
다행히 이미 이직 준비를 해왔던 터라 손쉽게 다른 직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 당시 그 찰라의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영원히 사회에서 낙오자가 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고 생각하면 온몸의 털이 솟습니다.
사회 생활 10년차를 마감하는 지금, 그 찰라의 고통과 모멸감, 좌절감은 새로운 의욕의 밑바탕이 되었죠. 더 열심히 살았고, 더 강하게 일했으며, 더 능글맞게 사람을 대했고, 더 융통성있는 사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전보다 그때가 더 잘 살았고 그때보다 지금이 더 잘 살고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를 하기로 맘 먹었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였습니다.
그 사장님을 몇 년 후 다시 만났습니다. 당시 직원의 아이 돌잔치였습니다. 서로 웃으면서 잘 지내냐고 악수를 건냈죠.
당시를 기억하는 전직장 동료들이 경악을 하더군요.. 하핫..^^;
하지만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제게는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 사장님이 그 이후에 그만을 내보내고 나서 후회한다거나 아쉬워했다는 소리를 들어서 더 편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제 자신이 그에게 부끄럽지 않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겠죠.
어제 그 사장님이 회사를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신이 만든 회사였지만 외국업체에 지분을 팔고 계약직 사장자리를 차지했었는데 나왔다는 것은 아무래도 쫓겨난 것이겠죠. 그래도 뭔가 또 하시겠죠.
잘 되길 바랍니다. 다만 그때 처럼 대책없이 사람을 자르지 말았으면 좋겠고 그런 상황이 다시 그에게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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