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 통지서 받아본 적 있습니까?

Ring Idea 2007/10/30 23:47 Posted by 그만

이건 그냥 문득, 회사를 나가게 될 때 어떻게 나갔는지 생각하다가... 처음으로 해고 통지서라는 것을 받아보았던 기억이 나서 씁니다.

정황 설명은 구체적으로 하기 힘들구요.





모 회사, 외국계였죠.

어느 날 사장이 그만을 부릅니다. 입사한 지 불과 3개월 좀 지났을 때였죠.

그리고 하얀 봉투를 하나 내밉니다.

그 봉투가 무엇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 전주부터 시작된 사람 내보내기의 끝이 제 차례였으니까요.

알고 있으면서도 그 봉투를 받아 들었을 때는 묘한 감정, 그리고 복잡한 생각들...

사실 그 봉투도, 제가 만들라고 종용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죠. 전 주에 해고 대상이었던 사람들에게 노동법에 대해 이야기해주면서 해고통지는 사실 서면이 아니더라도 구두로 할 수 있지만 이의신청을 낼 수 있고 구두 해고통지에 대해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노동자라면 갖고 있다고 말했죠.(지금은 서면으로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생겼습니다만 ^^)

해고 대상자는 사장실로 불려들어가 해고통지를 받았으나 사장에게 '서면으로 달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기가 막힌 것은 그 다음날 급하게 작성한 '해고통지서'를 그들에게 배포한 신속성이었습니다. 허헛. 그것도 그만이 이미 인터넷으로 봤던 그 서식 그대로.

그 서식에 이름만 바뀐 채 내게 봉투에 담겨 넘어 온 거죠.





기가 막혔습니다. 아니 어쩌면 난 해고통지보다는 사직을 권고하는 온유한 문장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는지도 모르죠.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 사장을 앞에 두고 화를 냈습니다. 어찌 이럴 수 있냐고. 일도 제대로 할 수 있는 시간도 주지도 않고 이렇게 부당하게 사람을 내보내면 어떻게 하냐고.

속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온통 뒤죽박죽이었죠. 이성적이고 차가운 음성으로 시작된 항의는 결국 큰 목소리와 문을 쾅하고 닫는 소음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고 나서 문 밖을 나가 씩씩 거리며 있다 보니... 그 사장님이 어찌나 측은하던지요. 왜 그는 나같은 풋내기에게 심한 말을 듣고 같이 언성을 높였어야 했는지 얼마나 스스로 비참했을까요. 해고통지서를 주고 받던 우리는 그렇게 서로 불쌍했습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당시를 다시 기억해봅니다.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반드시 이런 수모에 대해 복수하고 말겠다는 생각도 들었다가, 얼마나 절박했으면 사람을 뽑았다가 몇 개월 지나지도 않고 내보내야 했을까 안타까운 생각도 들었죠.

다행히 이미 이직 준비를 해왔던 터라 손쉽게 다른 직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 당시 그 찰라의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영원히 사회에서 낙오자가 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고 생각하면 온몸의 털이 솟습니다.

사회 생활 10년차를 마감하는 지금, 그 찰라의 고통과 모멸감, 좌절감은 새로운 의욕의 밑바탕이 되었죠. 더 열심히 살았고, 더 강하게 일했으며, 더 능글맞게 사람을 대했고, 더 융통성있는 사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전보다 그때가 더 잘 살았고 그때보다 지금이 더 잘 살고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를 하기로 맘 먹었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였습니다.




그 사장님을 몇 년 후 다시 만났습니다. 당시 직원의 아이 돌잔치였습니다. 서로 웃으면서 잘 지내냐고 악수를 건냈죠.

당시를 기억하는 전직장 동료들이 경악을 하더군요.. 하핫..^^;

하지만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제게는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 사장님이 그 이후에 그만을 내보내고 나서 후회한다거나 아쉬워했다는 소리를 들어서 더 편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제 자신이 그에게 부끄럽지 않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겠죠.





어제 그 사장님이 회사를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신이 만든 회사였지만 외국업체에 지분을 팔고 계약직 사장자리를 차지했었는데 나왔다는 것은 아무래도 쫓겨난 것이겠죠. 그래도 뭔가 또 하시겠죠.

잘 되길 바랍니다. 다만 그때 처럼 대책없이 사람을 자르지 말았으면 좋겠고 그런 상황이 다시 그에게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Writer profile
author image
링블로그 주인장 그만입니다. 그만에 대한 설명은 http://ringblog.net/notice/1237 공지글을 참고하세요. 제 글은 CC가 적용된 글로 출처를 표기하시고 원문을 훼손하지 않은 상태로 퍼가셔도 됩니다. 다만 글은 이후에 계속 수정될 수 있습니다.
2007/10/30 23:47 2007/10/30 23:47

TRACKBACK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1  ... 938 939 940 941 942 943 944 945 946  ... 1951 

카테고리

전체 (1951)
News Ring (644)
Column Ring (295)
Ring Idea (1004)
Ring Blog Net (8)
Scrap BOX(blinded) (0)

달력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링블로그-그만의 아이디어

그만's Blog is powered by TEXTCUBE / Supported by TNM
Copyright by 그만 [ http://www.ringblog.net ].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