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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통찰의 백과사전 피터 드러커

Ring Idea 2009/05/08 23:19 Posted by 그만
창피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10여 년 전 미래학자로 유명한 엘빈 토플러 책을 섭렵할 무렵 함께 읽었던 <21세기 지식경영>의 저자와 <미래기업>의 저자가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아챌만한 안목이 내겐 없었다. 그나마 몇년 전에 읽은 얇은 책 <피터 드러커의 위대한 혁신>은 책 제목 때문이었는지 이름이 낯설지 않았을 뿐이다.

게다가 난 사회과학 분야에 매몰돼 있으면서 경제 경영서적 쪽은 그다지 잘 읽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다 직장생활 몇 년만에 정서적으로 불안한 시기가 찾아왔고 그때 마침 자기계발서 열풍이 일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직장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나 경제나 경영, 또는 조직내 관리자의 역할이 나올 때쯤 늘 '피터 드러커'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최근 소개한 <공병호의 인생의 기술>에 달린 댓글에서 비로소 그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각인한 채 '큰 실망을 얻기 위해 큰 기대를 갖고' 그의 발언록으로 불리는 책을 온라인 서점에서 구매했다. 단단히 맘을 먹고 시작했다. 그래봤자 '했던 이야기 또 하는 꼰대겠지' 하는 생각으로 읽어 나갔다.

오늘의 책 이야기는 <한권으로 읽는 드러커100년의 철학>이다.

한권으로 읽는 드러커 100년의 철학 - 10점
피터 드러커 지음, 남상진 옮김/청림출판


앞에서 말한 '큰 실망'을 했는지 그 결과를 굳이 말로 설명하기 전에 이 사진을 먼저 보여주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난 책을 읽을 때 책 모서리를 접어두는 습관이 있다. 보통은 아래쪽만을 접어서 이 페이지 안에 내가 다시 보아야 할, 또는 참고 해야 할 문구가 있다는 표시인 셈이다. 밑줄이나 메모는 할 때도 있고 안 할 때가 더 많다. 지나치게 책을 읽을 당시의 사고에 갇히게 될 가능성이 높아 가급적이면 밑줄도 삼가하는 편이긴 하다. 다시 한 번 읽을 때 모서리가 접힌 페이지를 유심히 봐주기를 미래의 나에게 기대하는 구석도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원저명이 'Drucker Sayings'인 만큼 명언집 다왔다. 도대체가 버릴 구석을 찾기 힘들었다. 이러다 책장 모서리를 다 접어 버려 두께가 두배가 되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찾던 문구, 내가 말하고 싶었던 문장, 사물과 현상을 투시하기에 모자랐던 부분을 명쾌하게 채워주는 그런 문장들이 가득했다.

그가 이 책을 집필한 지 1년여만에 사망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아쉬워 통탄할 만큼 96세의 삶을 정렬적으로 살아간 그의 통찰력은 그야말로 놀라운 투시력을 보여준다. 피터 드러커를 왜 현대 매니지먼트의 창시자, 또는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 부르는지, 왜 잭 웰치가 GE 회장으로 결정나자마자 드러커를 찾아 갔는지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최근의 책들이 '팩트', '사례', '통계', '현황', 그리고 약간의 해석과 억지스런 자기 생각을 덧붙여 주는 것에 비하면 드러커의 이 책은 마치 작정한 듯이 '숫자 제시' 자체가 희박하다. 그럼에도 문장에는 힘이 있고 그의 짧은 문장 속에 역사와 사회 심리학, 사회 생태학, 경영학, 경제학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현학의 허세도 보이지 않고 현란한 어휘로 사람들을 미혹에 빠트리지도 않는다. 그저 건조하지만 간결하고 강건하고 확신에 찬 말투가 생생히 살아 있다. 번역도 깔끔해서 오랫 동안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만한 이유를 가진 것 같다.

너무 나중에 알아봤다는 후회 때문이었을까. 피터 드러커의 수십권의 역작 저서들을 차례로 읽을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해서였을까. 무의식은 속도와 효율만 찾던 나에게 '한권으로 읽는'이란 문구가 적힌 이 책을 구매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후회 없다. 이 책은 앞으로 내게 피터 드러커의 어떤 이야기가 어느 책에 숨어 있는지 안내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경제지상주의의 종말'과 같은 과감하고 단정적인 표현을 담은 단락에 담긴 문장들이 어느 책에 포함돼 있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인간의 본질에 관한 이념이 사회의 목적을 결정하고 인간의 실존에 관한 이념이 그 목적을 추구할 영역을 결정짓는다. 인간의 본질과 실존에 관한 이 같은 이념들은 사회의 성격을 바꾸고 개인과 사회 간의 근본적인 관계를 변화시킨다.
- <한권으로 읽는 피터 드러커 100년의 철학> 피터 드러커 222p

이 내용은 원래 1942년 쓰여진 <산업인의 미래>란 책에서 뽑아내 실은 문장이다. 인간에 대한 탐구와 인간끼리의 상호 작용이 만들어내는 화합과 불합치, 그리고 조직과 인간의 거리를 면밀하게 관찰했던 피터 드러커가 사회적 변화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또는 이런 내용은 어떠한가.

전시가 아닌 평화로운 시기에도 불합리하며 계산이 불가능한 힘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대공황은 분명히 보여 주었다. 반영구적 실업이 언제 닥쳐와 한참 일하는, 혹은 일을 시작하기도 전의 사람들을 산업폐기물 더미 위에 던져버릴지 모른다는 현실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 같은 책 225p

이 내용은 1939년 <경제인의 종말>이란 책에서 언급된 내용이다. 어떤 예가 더 필요한가. 세상은 원래 설명하기 힘든 단기적 혼란이 있게 마련이란 것을 이미 70년 전에 간파한 피터 드러커를 따르지 않는다면 누구를 따른단 말인가.

비교적 최근이지만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내가 지금 매력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복잡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사람이 피터 드러커였다. 1989년 <새로운 현실>이란 책에서는 이런 문장이 뽑혔다.

근대수학의 복잡계 이론에 따르면 복잡한 시스템은 단기적으로는 예측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들은 단기적으로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은 요소에 의해 지배된다. 이것을 버터플라이 효과라고 부른다. 수학적으로, 또 실험적으로 엄격히 증명된 다소 기발한 이 법칙에 따르면 아마존 열대우림의 나비의 날개짓이 수주일 혹은 수개월 후 시카고의 날씨를 변화시킬 수 있으며, 실제로 바꾸는 경우도 있다.
- 같은 책 225p

인문학적인 소양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피터 드러커. 그는 자신을 스스로 '보기 위해 태어난(born to see)' 사람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즉, 관찰하고 전망하고 조망하는 것을 즐겼다는 뜻이다.

현상을 죽 늘어놓으면서 지나치게 미시적으로 파헤치고 너무나 두루뭉술하게 해석하는듯 마는듯 하면서 경험 섞고, 인용문 섞는 국내 자기계발서 시장의 온갖 미사여구에서 빠져나오고 싶다면 이 책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피터 드러커의 강렬하고 자신만만한, 그러면서도 일관성 있는 사회를 바라보는 통찰력의 압축판을 읽고 싶다거나 그동안 피터 드러커의 관점을 재구성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좋은 책이다.

조금은 생뚱맞지만 현대 고전으로 불리는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 있을 것 같다. 제레미 리프킨이 거시적인 세계 문명의 문제를 비관적으로 읊었다면 피터 드러커는 건조하게, 또는 매우 친근하게 우리에게 살아남는 법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넌 어차피 죽게 돼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과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은 하는 게 어때?'라고 말하는 사람의 차이랄까.

어쨌든 이 책은 나 처럼 피터 드러커를 재발견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좋은 지침서다. 충분히 별 다섯 개를 받을만큼의 가치를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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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블로그 주인장 그만입니다. 그만에 대한 설명은 http://ringblog.net/notice/1237 공지글을 참고하세요. 제 글은 CC가 적용된 글로 출처를 표기하시고 원문을 훼손하지 않은 상태로 퍼가셔도 됩니다. 다만 글은 이후에 계속 수정될 수 있습니다.
2009/05/08 23:19 2009/05/08 23:19

고체 잉크가 첫선을 보였다고?

Ring Idea 2009/05/08 09:42 Posted by 그만
아침 일찍 출근해서 죽 둘러보고 있는데 황당한 뉴스가 떴네요.

고체잉크 컬러 프린터 첫선[전자신문] (**덧, 오후 6시 현재 제목을 바꿨군요. 비용 대폭 줄인 고체잉크 컬러 프린터 출시)

설마 전자신문에서 이런 기사가 나올줄은 몰랐습니다. 솔직히 제목만 그런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리드문(서문)이 가관입니다.

토너 카트리지가 아닌 고체 잉크를 사용해 인쇄 비용을 3분의 1 수준으로 줄일 수 있는 기업용 컬러 프린터가 등장했다.
...(중략)...
고체잉크 기술은 프린터 내부의 간소화 바람도 불러올 전망이다. 고체잉크 기기에 필요한 부품은 기존 제품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거추장스러운 토너 카트리지를 프린터 내부에 밀어 넣는 대신, 사용자는 간단하게 잉크 스틱을 꽂기만 하면 된다. 재활용을 할 수 없지만 전체 비용은 리필잉크에 비해 훨씬 싼 편이다.

아, 손발이 오그라드는 이 상황을 어찌할까요.

이미 90년대 후반부터 고체잉크를 사용하는 레이저 프린터가 존재했고 상당수 기업에서 이 컬러 레이저 프린터를 사기도 했습니다. 90년대 말, 그러니까 99년 아니면 2000년 즈음(확실하게 찾아보고 이 문구는 수정하겠습니다)에는 텍트로닉스(Tektornix)라는 회사에서 한국 진출을 공식화하면서 고체잉크 평생 무상 공급을 약속하는 마케팅을 펼치기도 했죠.(텍트로닉스가 제록스에 인수되어 솔리드잉크, 즉 고체잉크 기술을 제록스가 갖게 된 겁니다.)

하지만 고체잉크가 전반적인 패러다임 교체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기존의 가루 방식의 토너보다 예열하는 시간도 오래걸리고 열에 의한 변화 정도가 심한데다 종이와의 밀착도도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었죠. 가장 큰 걸림돌은 정작 고체 잉크 값은 그다지 비싸진 않은데 기기 값도 비싸고 예열 시간이 길고 전기 소모도 상당한데다 고체 잉크 특유의 기화 냄새가 고약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제록스의 이번 컬러큐브의 개발은 이런 단점 가운데 컬러프린팅 유지비 부분을 획기적으로 낮췄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그래서 전자신문이 인용 번역한 뉴욕타임즈의 원문 보도를 보면 이같은 내용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New Inks Cut Costs of Office Color Printing [The New York Times]

그러니까 전자신문의 보도는 완전히 오도한 것이죠. 홍보담당자들에게 보도자료 교육을 진행하면서 '진실한 최초, 최고'에 대한 강조를 여러 차례 했지만 외신 번역을 하면서 엉뚱하게 최초를 만들어버리면 곤란하겠죠.

더구나 뉴욕타임즈의 기사를 번역하다보면 '아 제록스 이야기구나' 하면 바로 제록스 홈페이지에 달려가서 그림이라도 건질 것이 있는지, 아니면 뉴욕타임즈 기사가 부정확하거나 수치 오류가 있는지 따져볼 수 있답니다.

제록스 홈페이지에서 'Newsroom'에 들어가 해당 보도자료를 찾아볼까요.

Breakthrough Xerox Multifunction Printer Cuts Cost of Color Pages by up to 62 Percent; Reduces Waste by 90 Percent [Xerox]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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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골적인 보도자료 제목(유지비 절감이 헤드라인입니다)만 봐도 전자신문 기사의 제목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알 수 있겠죠? 그리고 해당 기업의 보도자료를 무시한 탓에 친절하게 첨부돼 있는 멋진 자료사진을 첨부할 기회를 놓친 것이죠.

보도자료만 보고 쓰는 것도 문제지만 보도자료도 안 보고 기사 쓰는 것은 더 문제입니다.

전자신문이 일단 출고한 기사인데요. 변화가 있을지 지켜보겠습니다.

* 덧, 이 기사가 뉴스캐스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군요. 뉴스캐스트의 제목도 잘못됐네요. 근데 또 사진은 원문 보도자료 것을 가져오긴 했네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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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8 09:42 2009/05/08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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