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은 악플러들을 위한 장치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견제받지 않고 통제받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에 대한 존중이다.
무명씨(익명)의 역할, 사실은 천기누설에 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가리고 사안에 집중하게 만드는 힘. 필요한 것만 드러내고 나머지는 알리지 않은 채 한 가지 사실에 대한 표현만으로 충분해진다.
무명씨는 민주주의 사회의 전통이다. 그래서 무기명 투표를 아직도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주어진 것에서 내가 누구임을 밝힌 상태로 그 다음의 투표 행위에는 철저한 익명으로 보장되는 것이다.
또한 무명씨는 사회 통계를 객관적으로 만들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다.
소득을 묻고 가정사를 묻고, 유부녀에게 남편 이외의 애인이 있는지를 묻는다. 국가 정책에 대한 찬반을 묻고 한 사람에 대한 주관적인 지지도를 묻는다. 다른 사람은 몰라야 한다. 다만 그 합에 대해서만 모든 사람이 알고 자기가 소수파인지 다수파인지만 파악하면 된다.
그로부터 소수파는 다수파가 되기 위한 투쟁을 벌이면 되고 소수파일 수밖에 없는 점을 인정하고 다수파가 되기 위한 전략을 짜기보다 은연중에 다수파로 편입해도 된다.
비난하거나 비난받는 대상은 무명씨들의 집합인 대중이어야 한다. 개인이 자신의 사상 때문에 피해받지 않아야 사회가 안전해진다.
또 하나, 내부고발자와 사회부조리 고발자들에게 보호막이 필요하다. 바로 익명이다. 그들은 천기누설의 욕망을 무명씨로 변신해 고발한다.
아고라의 '
현직기자가 바라본 조선일보'에서 말하는 이는 '지나가다'다. 우리나라 인터넷에 가장 많은 성이 '지' 씨일지 모른다.
사람들은 단순한 호기심에 '지나가다'를 궁금해 한다. 더구나 '현직기자'라는 힌트까지 주지 않았는가. 그러나 더 이상의 호기심은 필요없다. 당당하라고 말하지 말라. 당신은 당신 동료가 옆에서 빤히 보고 있는데 다른 이에게 동료 욕을 할 수 있는가. 정말 동료가 잘못하고 있고 동료가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상태에서 '당당'하라는 말을 할 수 있는가.
그가 현직기자가 아니고 전직기자든, 홍보담당자든, 공보담당자든 정말 그러한지 사실 여부와 논리적 연결성에 대한 공감이 중요하다고 본다. 정말 그럴 수도 있겠는지, 반박할만한 여지는 없는지.. 우리를 생각하게 만들고 사안의 본질에 접근하도록 유도하고 있는지만 판단하면 된다.
내부 고발에 대해 '비겁자', '배신자' 낙인을 찍기 좋아하고 '음악 표절' 문제를 거론하면 '실패한 음악 지망생' 정도로 고발자를 깎아 내리기 바쁜 이 사회에서 당신은 과연 얼마나 당당하게 살 수 있는가.
익명 제보는 언론에서도 취재원 보호라는 명목으로 관행화 돼 있다. 어쩌면 언론의 덕목 가운데 가장 최고의 위치에 있는 것이 '취재원 보호'다. 그의 말을 그대로 이어받아 쓰는 기자에게 취재원을 밝히라는 요구는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과 같다.
익명과 무명씨가 동원돼 무차별적으로 이용되고 악용되는 사례가 없다고 말할 수 없으나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수는 없는 일이다.
인터넷 실명제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성은 이러한 무명씨들의 활약을 위축시킨다.
악플러가 싫은 것 뿐, 선의의 고발을 할 수 있는 무명씨가 싫은 것이 아니다.
포르노가 무차별적으로 보여지는 것이 싫을 뿐, 사적인 성적 교감이 싫은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