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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숲 -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 |
오랜만에 읽은 소설이다. <용의자 X의 헌신>이라는 야릇한 제목의 소설로 주목받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형사' 시리즈의 두 번째다.
추리라는 장르가 갖고 있는 매력은 '반전'이며 '설명' 그리고 '조각 맞추기'라고 할 수 있다. 화자가 갑자기 자기가 설명하던 '그'가 되어 버리는 반전은 모리스 루블랑의 <괴도 루팡>에서 빛을 발했다. 그리고 사건이 발생되고 작은 단서들을 찾아 왜 이것이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하고 범인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기술은 단연 아서 코난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가 손꼽힌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포와로' 형사도 기억에 남는다. 사건의 당사자를 모아 놓고 차근차근 설명하는 장면에서는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게 한다. 공포스러운 반전과 음울한 이야기의 <검은 고양이>를 쓴 작가가 애너벨 리 라는 시를 썼던 애드거 앨런 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전율마저 느꼈다.
이후 추리소설의 반복되는 듯한 패턴에 지겨워졌던 경험이 있다. 뭔가 사건의 주변에 증오가 곳곳에 숨겨져 있고, 살인과 치정과 복잡한 정치적인 이야기가 얼키고 설키는 관계를 반복적으로 보는 것은 고역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름 로멘스와 무협과 견주어도 전혀 아쉬울 것이 없는 추리 장르 소설은 여전히 출판계를 먹여 살리는 중요한 아이템이다. 영화화 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이기도 하다. 많은 소설들이 장르를 파괴해 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막판에 '범인은 당신이야'라고 외치는 탐정과 경찰의 일갈은 청량음료 같은 톡쏘는 느낌을 준다.
많이 돌아왔지만 <잠자는 숲>은 추리라는 장르가 가진 특성상 가가 형사라는 해결사 캐릭터를 활용한 시리즈물이다. 출판사는 소설에 대한 설명에서 느껴지듯 '가가'라는 캐릭터에 실재감을 불어넣어주고 독창성을 부여하려 한다. 실제로 '냉철하지만 감성적이고 인간적인 형사' 캐릭터를 위해 소설은 사건의 전개 외에도 가가 형사의 심리적인 면을 담담하게 쫓으며 독자에게 차츰 동질감을 느끼게 만든다.
하지만 일본 소설의 특성상 인물이 많아지면서 '~코', '~키' 이런 식의 이름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발레리나들이 줄지어 나오는데 누가 누구인지 중간중간 헷갈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는 순전히 내 탓이다. 인물 설명보다 사건에 몰입하고 작가가 곳곳에 장치해 놓았을 트릭과 숨겨진 복선을 탐색하면서 오히려 일본인 인물의 이름이 방해를 하는 것이다. 물론 마지막에 책을 다 읽고 나서 헷갈리는 것이 많이 정리되지만 각 인물의 특성을 구별해 내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이 소설은 추리 장르가 갖춰야 할 미덕인 현실적인 사건 전개나 트릭의 난이도, 설정 인물들의 심리와 행동 묘사, 범인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반전과 긴박한 심리적 혼돈을 잘 그려냈다고 볼 수 있다. 번역자는 '화려한 문장이 없다'고 표현했던 것 처럼 그다지 군더더기가 많이 보이지 않는다. 문장은 짧고 인물들의 행동 묘사에 있어서 난해한 표현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나름 수작으로 인정받을 만 하다고 느꼈다. 발레단 내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 주요 테마이긴 한데 발레에 대해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냥 덤덤히 창 밖 너머 야외무대 구경하듯 발레에 대한 설명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아쉽게도 나로서는 이 소설 속 '가가 형사'에게 그다지 감정이 이입되지 않았다. 이 소설의 주된 흐름이 살인 사건의 전개와 해결이라면 부차적인 흐름으로 사건의 전개와는 무관한 흐름을 보여주는 가가 형사에 대한 묘사는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것은 내가 사건의 전개에 있어서 가가 형사의 움직임 이외의 심리 묘사에 갈증을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가끔 가가 형사의 행동과 말은 생뚱맞아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읽은 괜찮은 장르소설임에도 별 셋을 주었던 것은 바로 지극히 주관적인 이유였다. 이름도 헷갈리는데다 가가 형사가 그다지 내게는 매력적인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홈즈나 포와로 같은 전체의 흐름을 장악하고 범인의 심리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에 대한 기대에 약간 못 미쳤고 범인과의 심리전에서 단연코 흔들리지 않는 진중하면서도 다이내믹한 반전을 이끌어내는 기교로 인한 긴장감 역시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내가 매기는 별점 셋의 의미는 '봐도 크게 아쉽진 않다' 정도의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