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 기자들이 복귀를 포기하고 새로운 독립 시사저널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지난 6월 26일, 그만은 심경이 매우 복잡했다.
그동안의 시사저널쪽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면서도 단 한줄의 글도 싣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복잡하고 무거웠다. 변명하자면 그만의 또다른 침묵이었다.
하지만 빅뉴스의 이런 아전인수격인 글을 보고 있자니 뭔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아 몇 줄의 글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사저널은 삼성이 아닌 노무현 정권이 죽였다" [빅뉴스]
몇 줄을 인용하면 이렇다.
시사저널은 노무현 정권이 죽였다
오마이뉴스와 미디어오늘은 시사저널 사태에 대해 주로 삼성을 비판하고, 자본권력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는 논조로 기사를 다뤘다. 물론 그 주장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시사저널 사태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권력과 자본으로 편집권을 침해하는 일이 언제 어디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데 있다. 당장 오마이뉴스와 미디어오늘부터 노무현 정권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지 묻고 싶다. 새 매체를 창간준비중인 시사저널 기자들도 마찬가지다. 자본으로부터 최소한 독립될 수 있는 수익구조가 마련되지 않는 한 제2의 금창태 사장, 제3의 위기는 얼마든지 찾아올 수 있다.
노무현 정권 들어 우리나라 언론계는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더욱 자유로워질 수 없게 되었다. 노 정권은 종이신문 말살 정책을 통해 신문을 보지 말라고 매일 같이 주문을 걸고 있고, 연합뉴스가 대부분인 포털뉴스와 무가지를 국민들에게 주입하고 있다. 국민들은 아침엔 무가지, 오후엔 포털뉴스에 중독 되어 더 이상 돈을 주고 종이신문을 사지 않는다.
내용을 죽 훑다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시사저널 사태와 노무현 정부 들어서서 포털 뉴스와 무가지가 득세하는 상황을 억지로 엮었다.
빅뉴스는 변희재씨를 앞세운 '안티포털', '안티무가지'에 대한 일관성(?)있는 주장을 펴고 있는 곳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이트에서 '포털' 등의 기사 검색을 보면 얼마나 기사가 자기 본위적이고 사실보다는 문제제기만을 일삼고 있는지 그대로 드러난다.
그들의 포털에 대한 공격과 무가지에 대한 공격은 아이러니하게도 '신문 살리기'의 일환이다. 신문이 죽고 있으니 포털과 무가지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말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똑똑하시다는 국회의원들까지 혹해서 이들의 논리에 맞춰 법안을 준비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시사저널과 연결시키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그 똑똑한 머리로 그렇게 억지로 끌어다 붙여선 안되는 거 아닌가.
신문은 삼성의 놀음에 자유로운가? 신문을 살려 놓으면 자본과 권력의 견제에 굳건히 견딜 수 있는가? 과연 그렇게 생각하는가. 신문에서 지금도 광고주의 입김 때문에 사장되고 기획 단계에서 사라져 버리는 사실들이 그렇게 많은 것을 도대체 왜 '다 노무현 때문'이라고 몰아 세우는가.
자신의 주장을 근사하게 보이기 위해 시사저널 사태의 본질보다 현대 언론사의 비극적인 이 사건을 끌어들이는 것은 시사저널 퇴직 기자들에게도 예의가 아니다.
작은 시사저널 사태는 늘 있어 왔다
시사저널 사태의 본질은 자본 권력이 언론을 어느 정도까지 통제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다. 이미 결과적으로 '자본은 언론을 통제할 수 있다'라는 답이 나와 버린 상태다.
대다수 언론사 영업 형태는 '도와주십시오', 또는 '경쟁에는 광고하셨던데 우리도 주셔야죠'다. 백이면 8, 90%가 다 이렇다. 광고 효과나 구독자 프로파일을 통한 과학적인 데이터 하나 제대로 들이대는 곳이 없다.
신문이면 '우리 몇백만부 찍습니다', 또는 부수가 좀 딸리면 '오피니언 리더들이 봅니다', 아니면 경제지 등 전문지는 '업계 관계자들의 열독률이 높습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광고 영업 형태는 매우 단순하고 직설적이기 때문에 대부분 '영향력'에 기대는 광고를 하기도 한다. 이른다 '조지고, 까고, 파헤치고'다. 기사를 동원해야 광고를 넣어주겠느냐는 것이다.
심지어 일부러 오보를 내보내기도 한다. 담당자 이름을 잘못 쓴다거나 회사명을 잘못 쓰는 경우, 또는 대표자 이름을 엉뚱하게 바꿔 쓰는 경우, 어이없게도 A사의 자료를 인용하면서 A의 경쟁사 담당자 이름를 일부러 넣는 경우도 있다. 기자나 데스크가 '내게 관심을 가져달라'는 의사 표시인 것을 아는 담당자들은 '광고 달라는 소리구나'라는 것을 안다.
신문이나 잡지 할 것 없이 우리나라 언론계의 가장 큰 병은 '광고 의존도가 너무 높다'는 것이다. 이는 10여년 전부터 있어왔던 증면 경쟁이 가져온 폐해 가운데 하나다. 지면을 늘리는 것이 정보의 양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광고를 배치하기 위한 지면을 늘리기 위한 수단임을 언론계는 일찍부터 문제를 삼아 왔다.
최근에는 '기획 기자'라는 이상한 타이틀의 직업도 생겼다. 일반 취재 기자들이 광고성 기사를 쓰기를 꺼려하자 아예 광고주 입맛에 맞는 기획 기사를 생산해내는 '광고 기자'들이다. 이들의 수입은 광고 수주에 따른 인센티브가 적용된다.
시즌만 되면 섹션이 남발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부동산 광고가 들어오면 섹션을 만들어 부동산 지면을 늘린다. 주식이 뜨면 증권이나 펀드 등 재태크 지면을 늘린다. 이제 휴가철이다. 각 신문들은 여행 특집을 만들기 바쁠 시즌이다. 여행사 광고가 지면을 가득 채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광고주 의존 현상은 구독료 인상이 제때 이뤄지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신문사의 증면 경쟁과 부수 경쟁은 자전거 신문 등 경품 지원을 비롯해 종이값 인상과 인건비 인상, 각종 간접 비용 인상을 따라 갈 수 있는 수익모델을 광고 이외에는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언론사는 전람회나 컨퍼런스, 전시회 등을 유치하면서 부수입을 얻는 경우도 있었으며 일부에서는 '히트상품' 등의 각종 상을 만들어 해당 기업이 광고를 하지 않으면 '체면이 안 서는' 상황을 만들어 부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70% 이상의 광고 의존도를 낳았고 이는 근본적인 신문 위기의 본질이 돼 버렸다. 신문보다 과학적이라고 믿을만한 뉴미디어가 줄을 서고 더 영향력이 커져버린 영상 광고 쪽으로 광고주들이 눈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면 광고 의존도가 높은 신문일수록 위기를 빨리 맞을 수밖에 없게 된다.
한 달에 1만원에서 1만 2천원의 구독료는 신문 원가의 40%도 채워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구독료 인상 시기를 중앙일보의 어처구니 없는 '광고주의 도움으로 구독료를 인하하는 조치'로 인해 신문사들이 모두 놓쳐버리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 그들이 말하는 '국민'과 '독자'는 부수적인 객체로 전락하게 된다. 적어도 광고주가 좋아하지 않을 만한 기사는 싣기 힘들어지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기자들과 경영진과의 언론관과 언론기업관 사이의 간극을 만들어내는 주요한 요인이다.
기자들은 자기가 속한 기업에 어떻게든 도움을 줘야 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가판에 올렸던 기사가 축소되는 것이나 빠지는 경우는 오보 때문만은 아니다. 가판을 보고 압력을 행사하는 광고주들의 요청 때문인 경우도 많고 오히려 이를 악 이용하는 언론사도 많은 것이 현실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가판 관행을 비판하는 주요한 원인은 기사 베끼기와 더불어 광고주와의 의도적인 마찰과 광고주에 의한 압력 행사의 수단으로 변질됐기 때문이다.
신문은 아니지만 시사저널 사태가 보여준 것은 이러한 복잡한 관계 설정이 낳은, 어찌보면 필연적인 결과물인 것이다. 시사저널만 경영난을 처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 눈에 경영진의 광고주에 의한 자발적 굴복에 반항하고 기타 국내 거대 기업의 관련 기사였다는 것으로 우리의 가슴 속에 의미 있는 사건으로 발전된 것이다.
하지만 작은 시사저널 사태는 늘 있었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있을 것이다. 즉, 이는 앞으로 벌어지게 될 언론계 전반의 문제라고 봐야 한다.
권력으로부터의 독립보다 더 고민해야 할 자본으로부터의 독립
시사저널 사태가 벌어졌던 1년 전, 그만은 기자들의 당당한 외침에 맘 속 깊이 응원을 보냈다. 하지만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동아리가 아닌 기업 종사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시사저널사가 여러번의 우여 곡절 끝에 주인이 몇 번 바뀌어 온 과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라도 이 사태가 그리 긍정적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역시나 1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긍정적이지 않은 결과를 보고야 말았고 많이 안타까와 하고 있다.
처음 시사저널 거리 편집국이 블로그 형태로 꾸며져 나왔을 때 그만은 묘한 희열같은 것을 느꼈다.
그들은 충분히 독립 언론을 인터넷상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인터넷 기자는 아니었다. 여전히 '시사저널'이란 브랜드에 기대는 기자들이었고 '시사저널'이란 언론사 브랜드로 일해온 종사원이었으며 '시사저널'과 함께 청춘을 바쳐온 직업 기자였다.
그들이 '독립 시사저널'을 만들기 위해 성금을 모으고 있다고 한다. 많은 분들이 성금을 전달했을 것이다. 그만도 성금을 전달할 예정이다. 하지만 그 시도는 그렇게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들 역시 독립 언론이라고 만들면서 기업을 만들 것이고 그 기업은 이윤추구를 위해 광고를 받을 것이며 확보되지 않는 독자들을 위해 다시 비용을 지출하거나 광고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다시 종사원이 될 것이며 경영진과 종사자들로 나뉘어 기자와 발행인과의 관계를 재정립해 나갈 것이다.
지금 많은 지탄을 받고 있는 신생 신문과 신생 인터넷 신문들의 대다수가 기존 신문사 퇴직 간부나 언론계 인사들이 만든 회사들이고 이들은 올드 미디어의 영업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이른 바 '안면 영업'과 '조지고, 까고, 파헤지면 광고 나오는 시스템'을 답습하고 있다.
유난히 신생 매체가 비난 기사가 많다는 것은 독자들을 위한 '알권리 확보'보다는 '광고주에게 내 존재감 알리기' 차원이라는 것은 언론계 주변 사람들이 늘 공감하고 있는 이야기다.
독립 언론의 방향성은 새롭게 모색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웹 2.0의 가치 모델을 차용할 필요가 있다. 롱테일 경제를 곱씹어봐야 할 때가 왔으며 검색과 사용자의 참여와 연대를 위한 방향성 모색을 위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때가 왔다.
단순히 이런 모색을 올드미디어 죽이기 식의 유치한 흑백논리로 볼 것이 아니라 언론의 혁신(이노베이션)으로서의 가치 모델을 구상해야 할 때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사저널 퇴직 기자들에게 간절히 바라는데 '독립 시사저널'이 아닌 새시대에 맞는 '독립 저널'이 되어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