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악의 추억, 도시가 괴물이다

Ring Idea 2009/10/10 10:07 Posted by 그만
악의 추억 - 8점
이정명 지음/밀리언하우스

두어 달 전. 지인이 곧 출판될 책을 미리 읽고 느낀 점이나 개선해야 할 점을 지적해주기를 바라는 '가제본' 행사를 제안해왔다. 이른 바 소프트웨어나 인터넷 서비스의 클로즈 베타 같은 행사인 셈이다. 당시 가제본 돼 있던 책은 '나에 대한 너의 거짓말'이란 야릇한 문장이었다. 미스테리 심리추리소설이라는 우리나라에서 쉽게 시도되지 않는 장르여서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읽어내려갔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지난 주 가제본 행사에 참여한 사람에게 신간이 발송되었다. 아... 이정명 작가의 작품이었구나. 가제본 때는 아예 누구의 작품인지 모르고 읽었는데 나중에 이정명 작가 작품이란 말에 '진짜 반전은 이거구나' 싶었다.

2007/03/12 [책] 뿌리깊은 나무

추천할만큼 재미있다. 아래는 출판사의 기고 요청으로 보낸 독자 서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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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ORPG 게임보다 긴장감 넘치는 심리추리소설

그래, 우리나라에도 이런 대중적이고 보편성을 갖춘 대작 스릴러 소설이 나올 때가 되었다.

처음 '악의 추억'을 읽으면서 당황했던 것은 번역 소설은 분명 아닌데 등장인물이 모두 서양인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상의 항구도시라는 배경 설정과 내용의 서양인으로 구성된 등장 인물이 공상 과학에서나 등장할 것만 같은 낯선 것은 아니었다. 순수하게 저자와 독자의 상상력 경쟁이 펼쳐지듯 마치 신기루 속에서 언뜻언뜻 비쳐지는, 그래서 상상만으로 그들의 완전한 모습을 머리 속에서 구상하게 되는 소설의 인물과 배경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독자는 소설 속에서 현실과의 구체적인 연계성을 찾아내려 몰입하지 않아도 된다. 괜히 현실 속 장소와 현실 속 사건과 현실 속 인물이 소설에서 툭툭 튀어나오면 일견 선입견에 사로잡혀 버리고 만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상상이며 잘짜여진 가상 사회다. 이 소설이 이끌어주는 이야기에 끌려다니기보다 소설과 함께 뛰고 구르고 넘어지고 다시 뒤돌아보는 전적인 이입단계에 들어갈 수 있다. 마치 인터넷 롤플레잉 게임하듯이 우린 형사가 되기도 하고 범죄자가 되기도 한다. 또는 그들을 관찰하는 심리분석관이어도 상관 없지 않은가.

이야기의 발단은 '살인사건'이다. 그리고 피해자의 얼굴은 알듯 모를듯한 '미소'를 담고 있다. 천재적인 감각으로 수사에 참여하는 크리스 매코이. 사건과 인물의 심리 상태를 추적하는 심리분석관 라일라 스펜서를 중심으로 이야기는 자꾸만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지만 사건 속 인물들에 대한 감정 이입은 그 정도가 더해간다.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살인하는 심리나 살해당하는 이의 심리까지도. 등장인물들은 깊은 트라우마 속에서 허우적대는 인간 군상의 단편들이며 그 군상들이 꿈꾸는 복수와 뜻하지 않는 깨달음과 자아에 대한 거부가 마구 뒤섞인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웃지만 분노하고 항구를 바라보지만 정작 안개 속에서 상상만 할 뿐이다. 괜한 심리학 이론을 늘어놓는 것보다 행위와 흔적만으로 범인의 심리를 파악하고 유추하면서 사진 퍼즐 맞추듯 맞춰나가는 재미 역시 이 소설의 특징이다.

물론 이 소설이 여지없이 최고의 소설이라고 엄지 손가락을 세우기는 좀 어렵겠다. 우리나라 작가가 쓴 소설이라는 선입견이 작용했는지 모르겠지만 서양인의 묘사에 어색한 구석이 종종 섞여 있고 그들의 대화가 마치 더빙돼 있는 외화를 보는 듯한 느낌도 받는다. 더구나 가끔씩 등장하는 주변인들의 이름이 다시 등장할 때는 그가 누구인지, 심지어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헷갈린다. 25분마다 절정을 맞는 미국 드라마 처럼 연신 숨을 돌릴 기회도 주지 않고 내쳐 달리는 스토리와 반전의 연속에 지칠 수도 있다.

히지만 이퀄라이저의 하이볼룸이 좀 높다고 해서 첨단 MP3 플레이어를 쓰레기통에 넣는 사람이 없듯이 찬찬히 이야기에 매몰되다 보면 독자인 자신과 작가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입가에 아주 슬픈 미소를 띠고 헛헛한 웃음을 보여주는 소설 속 주인공이 어느 순간 우리의 대화에 낄 것만 같다. 심리추리소설이면서 심리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와 전체적인 환경 묘사가 버무려지면서 사회 고발 소설같은 느낌까지 받았다면 오버랄까.

마지막으로 무심결에 이 소설을 읽고나서 우리시대의 이야꾼 이정명 작가의 작품이란 것을 다시 되새겨본다면 예측하면서도 당하는 반전의 묘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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