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 있다. 이야기가 길지만 지루하진 않다. 그렇다고 짜임새가 엉망도 아니다. 마지막 반전을 위해 수차례의 절정을 맛보게 하는 플롯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엄청난 분량의 상상력에 놀랍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새로운 건 아니다.
그런데 어째 밋밋하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엄청난 에너지의 상상력을 선물했는데 마치 그 포장 위에 리본 하나 달아놓지 않은 느낌이랄까. 만족감이 낮진 않지만 그렇다고 베르베르가 그동안 내게 보여줬던 날카로운 풍자나 예측을 예리하게 엇나가는 반전은 없다.
<신> 이야기다. 제목 그대로 '신'과 관련된 이야기다. 아쉽게도 이 작품의 전작인 <타나토노트><천사들의 제국><빠삐용> 등을 읽지 못한 내게 이 소설은 어지간히 불친절하다. 마치 1권 전에 0.5권이 필요할 것만 같다. 주인공이 다른 소설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추억할 땐 적잖이 당황스럽다. 난 네 과거를 모른다구!
어쨌든 일단 소설이 전개되면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몰입감을 느낄 수 있다. 천사에서 신 후보생이 된 주인공 미카엘 팽송이 이야기해주는 신들의 나라라는 배경이 흥미롭기 때문이다. 이 배경 속에서는 감춰진 미스테리 지역도 있고 신들과 요정, 괴물들과 온갖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까지 모두 등장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한번쯤 심취해봤던 이라면 좀더 선명하게 이 소설 속 배경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온전히 지구와 같은 연습용 지구가 만들어지고 파괴되는 것이 신들의 경쟁 때문이라니 엄청난 스케일의 상상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런데도 독후감을 남기기 힘들었다.
이 소설을 완독한 것이 벌써 두 주 전이다. 이 소설에 대한 이야길 블로그에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좀 당혹스러웠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 해야 할지 내 상상력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느낌 그대로 쓰자니 책 전반이 산만하게 흩어져 있고 반전을 쓰자니 영락없는 스포일러가 될터이고 그렇다고 신화나 역사에 초점을 맞춰 쓰자니 소설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써야 하나 싶어서다.
기가 막힌 것은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등장 인물에 대해 쓰자니 더 난감할 따름이었다는 사실이다. 신이 신 같지 않고 신 후보생이나 영웅이나 모두 인간의 투영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주려고 작가는 무던히 애를 쓰고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오래전 그를 있게 만든 작품 <뇌>나 <개미> 등에서 보여줬던 유머와 박진감 넘치는 전개가 <신>에 고스란히 담겨 있음에도 이상하게 반복되는 미국식 블록버스터를 보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한국을 어지간히 사랑하는(어쩌면 한국인이 그의 소설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일지 모른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등장시킨 한국인 재일교포 3세 소녀는 한국인 독자에게 주는 건빵 속 알사탕 마냥 바갑다. 그렇다고 이 소녀의 이야기에 심취하기는 쉽지 않다. 수많은 스토리들이 각자 또 다른 액자 속 이야기로 전개되는 것은 물론, 작가의 풍부한 상식을 자랑이라도 하듯 중간중간 각주 처럼 나오는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은 읽는 재미를 높이기도 하고 흐름을 방해하기도 한다. 소설을 지하철에서 출퇴근하며 읽는 나로서는 이렇게 흐름이 끊어지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럽다.
베르나르의 6권짜리(원작은 3권인데 한국은 역시 장사 잘한다 --;) <신>은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재미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소설임에도 내게는 별점 3개 정도의 '평작'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중간중간 2권 정도의 분량이 빠졌더라면 좀더 긴박감 넘치고 충분한 철학적 상상력의 여지를 남겨줄 수 있음에도 상상력을 엄청난 분량으로 방만하게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상상력이 너무 넘쳐서 반전이 무뎌지고 가끔씩 참을 수 없는 지루한 독백을 듣는 느낌이 들었다. 전 6권 세트가 무려 6만원에 가깝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아쉬웠다.
역시 나에겐 짧은 단편의 강렬함이 좀더 입맛에 가까운가 보다. 아, 마지막 반전은 이현세의 오래 전 역작 <아마게돈> 만화를 상상하면 된다.(이거 출판사에서 전화오는 거 아니겠지? ^^;)
너무 야박하다고? 위대하고 유명한 소설가의 작품이라고 다 칭찬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면피를 위해서는 아니지만(!) 책 속에서 발견한 인간의 고정관념 때문에 생긴 위대한 오류(에러?)에 대한 두 이야기를 소개한다. 꼭 소개해주고 싶어서 접어놓았던 페이지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하나는 소설 본문이고 하나는 역자 주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십계명이 무엇을 하지 말라는 계율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만약 십계며이 금지의 계율이라면, <사린을 하면 안 된다>, <도둑질을 하면 안 된다> 하는 식으로 작성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십계명은 <너희는 살인을 하지 않으리라>, <너희는 도둑질을 하지 않으리라> 하고 미래 시제로 진술되어 있다. 그래서 일부 성서 주석가들은 십계명이 계율이라기보다 하나의 예언이라고 주장했다. <너희는 살인이 쓸모없는 짓임을 깨달을 것이므로 언젠가는 살인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너희는 살기 위해 남의 것을 훔쳐야 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기에 언젠가는 도둑질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는 뜻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십계명을 그런 관점에서 읽으면 범죄자를 벌하는 문제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다. 아무도 죄를 범하고 싶어 하지 않는 때가 되면 처벌도 불필요한 것이 될테니까 말이다.
- <신> 4권 413쪽
베르베르는 헤시오도스의 서사시 <일과 나날>(60~105행)에 근거하여 이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다만 <판도라의 상자>에 관해서는 헤시오도스의 원문이 아니라 에라스무스의 라틴어 번역 이후로 확립된 서구인의 상식을 따르고 있다. 헤시오도스의 그리스어 원문에는 상자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대신 단지나 항아리를 뜻하는 <피토스>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것이 상자로 바뀐 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윋한 인문학자 에라스무스의 영향이라고 한다. 그는 헤시오도스의 판도라 이야기를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피토스>라는 단어를 <픽시스(상자)>로 옮겼다. 유럽 언어들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판도라의 상자>라는 관용구는 결국 빛나는 오역(?)의 산물인 셈이다.
- <신> 4권 677쪽 역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