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인 해피엔딩이다. 처음 이 책을 들었을 때 망설여졌던 이유는 내 인생 최악의 책이었던 <한국의 부자들>이란 책을 집필한 저자가 쓴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책이 단순한 글 이상인 이유는 저자의 인생과 저자를 둘러 싼 많은 것들이 집약 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부자들>이란 책은 부자들의 부지런함과 통찰력을 부각시키는 데 성공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모든 허물을 '지나간 것'으로 용인해주는 모습을 보였다. 내용은 더 말하기 싫을 정도로 한국에서 부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세상과 남을 잘 이용해 먹는 것인지를 잘 설명해 놓았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1998년 외환위기로 IMF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복구의 시기를 거쳤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하게, 부자는 더 부자가 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절망을 하던 시기였다.
그러다 2002년 정권 교체 이후 2003년 <한국의 부자들> 따위의 책들이 수십종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세상은 "부자되세요~"가 새해 인사였다. 누구나 부자가 되려고 했고 재테크나 경제에 대한 이슈가 모든 정치 이슈를 잠식해나가던 시기였다. 그렇게 저질책 한권이 세상에 더 큰 파장을 낳았다. 이 책의 줄기는 바로 '부동산', '편법', '물려받은 재산', '은밀함', '사채' 등이었다. 기가 막힐 정도의 르뽀 소재였음에도 저자는 그들을 '부자'로 추켜세웠다.
저자 한상복은 남들이 부자인 이유를 알려준다며 그동안 취재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무용담을 모아 책을 냈다. 그 책에 힘입어 우리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헛된 환상을 한껏 심어주는 <한국의 부자들 2>를 기획해 내놓기도 했다. 부제가 '죽을 각오로 시작하는 부자되기 프로그램'이었다.
맙소사 죽음의 가치만큼 사람들이 부자가 되기를 바랬는지, 아니면 부자가 되려면 죽을 각오를 해야만 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나라에서 부자가 된다는 것은 죽기보다 힘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는지 몰라도 전작에 이어 다시 실망스러운 부동산 컨설팅을 하고 만다.
그런 그가 내놓은 '현대 우화집' <배려>는 어떨까. 일단 손에 잡힌 책은 거부하지 않고 읽을 수밖에 없는 천성 때문에라도 끝까지 죽 읽었다. 솔직히 그만이 평소에 좋아하는 단어여서 끌렸다고나 할까.
**참고, '현대 우화집'은 그만이 지은 말이다. 실용/경제 서적에서 요즘 이런 경향이 많이 보이는데 독자들이 좀더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중요한 메시지를 소설 형식을 빌은 이야기 속에 담으려는 시도이다. 번역서에서 많이 발견되는 이 출판 조류는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보이고 있다. 마치 원래 있던 분류법이라고 생각할지 몰라서 노파심에 언급한다.이 책의 핵심은 단순하다.
배려의 다섯가지 실천 포인트
1. 배려는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다.
2. 배려는 받기 전에 먼저 주는 것이다.
3. 배려는 날마다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4. 배려는 자연스럽고 즐거운 것이다.
5. 배려는 사소하지만 위대한 것이다. (254-255)
저자가 어쩌면 <논어>에 빠져 있는지 모르겠다. 한 이기적인 인물이 배려의 정신으로 똘똘 뭉친 주변인들로 인해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그렸다. 물론 이야기는 허구이며 현실성도 부족하고 마지막의 클라이맥스나 해피엔딩 부분에서는 실소마저 나올 정도다. 신파로 흐른 것을 보아하니 저자가 나이를 먹으면서 변화되고 있거나 혹은 저자가 실제로 기자를 그만두고 뛰쳐나와 세상과 맞닥뜨리며 느꼈던 '정의감'의 투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만은 이 책을 읽은 것에는 만족한다.
책 내용이 새로와서도, 또는 책에 있는 '배려'에 대한 요점 정리가 너무 친절해서도, 또는 이야기가 너무 흥미진진해서도 아니다.
오래 전부터 손해보고 있다는 느낌을 버리는 순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경험으로 공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혼란스러웠던 시절 극한의 이기주의에 빠져 있던 그만 역시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기주의가 낳은 후회로 괴로웠던 기억이 많았다. 반대로 작은 배려가 나중에 그만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어 주는지 깨닫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잊었고 다시 후회하고를 몇 차례...
그만에게 '배려'의 방법은 따로 있지 않았다. 당장 손해본다는 생각이 불쑥 올라와도 나중에 올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 참아야지라는 생각은 별로 도움이 안 됐다. 차라리 현재 내 맘을 평안하게 하려면 지금 참거나 잊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단지 이기주의의 방향을 바꾼 것이었다. 그게 남을 배려하는 것보다 쉬웠기 때문이었다.
대학 다닐 때였다. 학교 수업을 밥 먹듯이 빼먹는 친구가 있었다. 시험 때가 다가오자 노트 필기를 빌려달란다. 더구나 자기네 집 근처로 복사해서 가져와달란다. 기가막혔다. 결국 그렇게 해주었다. 배려라기보다는 속으로 '이 녀석에게 따끔하게 말해줘야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그리고 노트를 건내주는 자리에서 커피를 마시며 녀석에게 돌려 말했다. '넌 참 이기적이다' '너 참 못됐다'가 요점이었다.
그리고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십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마음이 불편하다.
왜 웃으며 주지 못했을까. 왜 단서를 달고 노트를 주었을까. 녀석에게 말 못할 사연이 있다는 것을 왜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까.
배려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임을 알았을 때 이미 세월은 많이 지나쳐 버렸다.
블로그는 그만의 또 다른 배려의 방식이다. 3월 30일, 내 생일에 이 책이 아니라 '배려'라는 단어를 한 번 더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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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 - 한상복 지음/위즈덤하우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