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겸임교수는 수년만에 소중한 아이템 하나를 발견한 듯 하다.
아마도 이 화려한 언변과 능숙한 문필가에게 심형래의 '디-워'는 그다지 평론할 가치가 있는 그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차원적인 미학 전문가인 진중권의 현실인식은 놀랍게도 디-워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언론의 중계 저널리즘, 댓글로 이뤄지고 있는 소위 네티즌이라 불리는 사람들에게 쏠려 있다. 그의 대중론은 그래서 '사회적 정신분석학' 수준이다.
디-워 자체에 대한 논평은 그에게 재미가 없다. 솔직히 그만도 디-워의 영화적 가치는 별로다. 심형래 감독 스스로도 '돈 벌기 위한 B급 영화'라고 하지 않던가.
2007/09/06 SFX 마니아의 디-워 관람기
연기니 스토리텔링이니 하는 거 다 무시하고 화끈한 볼거리에 감동하는 그만 조차 그 허무맹랑하고 유치한 전개에 화들짝 놀란 바 있다.
하지만 진중권의 디-워에 대한 끊임없는 '입장 정리'는 놀랍게도 구름 위에서 바라보는 군중들의 개미떼 행진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 보인다. 그 군중이 자신을 향해 던지는 조소에 당당히 맞서는 지성인의 역할을 자임한다.
그의 화끈한 논술은 점점 더 거침이 없어진다.
진씨는 "33조를 벌어다 주겠다던 황우석의 약속과 8조를 벌어다 주겠다던 심형래의 약속은 비현실적이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을 외려 불신했을 것"이라며 히틀러의 말을 빌려 "대중은 큰 거짓말일수록 쉽게 속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진중권 "'디워' 해프닝 '황우석 사태'와 비슷" [연합뉴스] 2007.09.20
맙소사 군중이 디-워가 몇 조 벌어주겠다는 약속을 다 믿을 것이라고 넘겨짚는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에게 있어서 대중은 '한줌 모래' 정도에 머물러 있다. 현대 사회와 네트워크가 가져다준 '집단지성' 따위는 그에게 있어서 '우매한 인간들의 말다툼' 정도로 비쳐지는 것이다.
"황우석 사건 때에도 대중은 이번과 거의 똑같은 패턴으로 반응했다. 앞으로 또 다른 몽상가가 또 다른 '기술'로 세계를 정복하겠노라고 '자극'을 주면, 대중은 아마 지금과 똑같은 열역학적 에너지를 가지고 뜨겁게 반응할 것" (위와 출처 같음)
그의 지식인다움은 현실을 분해하고 다시 재조합시키는 힘이다. 그에게 있어서 인터넷의 다양한 여론과 각 개인의 수준별 디-워 논쟁은 분해되고 디-빠만 네티즌의 영역에 설정해둔 채 분석을 이어나간다. 황우석 사건 당시의 집단적인 광기를 상기시키는 것도 이런 역할 설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리고 네티즌의 숭배 대상인 몽상가로 자신이 그토록 공격한 심형래 감독을 설정한다. 이미 그의 논평은 영화평을 뛰어넘는 수준이 되어 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절정의 공격적 어휘 구사는 급기야 디-워에 호의적인 모든 이들을 '정신병자' 취급한다. “그런 의미에서 ‘디워’는 한국사회가 앓고 있는 보편적 정신질환의 특수한 예에 불과하다.” 그는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수많은 사회적 병리현상 가운데 하나로 대중의 디-워에 대한 기대감을 편입시키는 능수능란함을 발휘했다.
대중들은 ‘환상’을 만들어내는 ‘영웅’을 쫓는다. “영웅이 위대해질수록 대중은 왜소해진다. 대중은 위대해지는 유일한 자신을 영웅과 동일시하는 것. 그리하여 대중은 그의 성공을 나의 성공처럼 기뻐하고, 그의 좌절을 나의 좌절로 슬퍼하며, ‘그’에 대한 찬양을 ‘나’에 대한 칭찬으로 여기고, ‘그’에 대한 비판을 ‘나’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디워’는 한국사회가 앓고있는 보편적 정신질환의 특수한 예” [문화일보] 2007.09.20
그는 디-워에 대한 다양한 분석과 시각을 함축시키고 이를 다시 이론화시키는 절정의 능숙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역사적인 의미와 사례를 뒤섞고 '영웅'과 '환상'이라는 어휘를 사용해 부정한 다수에 항거하기 위해 고전적인 비난 기법을 사용한다.
영웅과 환상에 대한 논법은 사회 현상 무엇을 대입시키든 손쉽게 '다수의 어리석음'을 일깨울 수 있는 기법이다.
예를 들어 진중권 겸임교수와 그가 추종하는 '지식인'을 '영웅'과 '환상'으로 대입시킬 경우 다음의 문장을 완성시킬 수 있다.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준거집단을 '지식인'으로 상정하고 그 가운데 '환상'을 만들어내는 학자를 추종한다. 영웅인 학자들이 위대해질수록 지식인은 왜소해진다. 엘리트들은 결국 지식인과 학자를 동일시한다.
엘리트들은 대중에 대해 조소를 날리는 학자들과 그들 위에 군림하며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옳은 것인지 가르치는 모습을 보며 만족해 한다. 또한 엘리트들은 지성인들의 좌절을 궁극적인 대중에 의한 집단적 광기에 의한 것으로 설정한다. 자신들끼리의 토론은 당연하지만 군중과의 대화는 실속이 없다고 단정짓는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군중 속이 아닌 지성인의 일원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는 '환상'을 현실화시키는 과정이다. 지식인의 영웅인 평론가와 학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곧 자신들을 비판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함께 반격을 준비한다.
여기서 잘못된 것은 '환상'이라거나 '영웅'이라거나 하는 극단적인 어휘가 들어가면서 논리 전개가 비약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도 스스로 그 점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 교수는 자신의 논리 비약은 대중의 논리 비약보다 덜하다고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논객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그렇다면 왜 진중권 겸임교수는 끊임없이 디-워 속에 있고 싶어하는가.
피한다는 비난을 들을까봐? 또는 궁극적으로 디-워의 성공스토리에 반했던 자신의 논리가 약해지는 것을 보강하기 위해서? 그것도 아니면 논객으로서의 자리매김을 재확인시켜주기 위해?
집단적인 광기에 대항하는 마지막 남은 지성인이고 싶어서?
사실 논객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보면 왜 진중권 교수의 이런 질긴 논점이 날이 갈수록 갈짓자를 그으면서 확대일로에 있는지 알 수 있다.
논객들은
▲언론이 화두를 꺼내준 이슈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작은 사건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 논술의 효용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다수의 이슈에 뛰어들어가야 한다. 디-워 개봉한 지 2주만에 'B급 영화'를 논하기 위한 TV 토론에 참석했던 그의 탁월한 이슈 참여 감각이 놀라울 따름이다.
▲현상을 서술하는 것이 아닌 이면의 '거대한 힘'을 상정해 두어야 한다. 그래야 싸울맛이 난다. 논객들이 약자나 소수의 편이라 여기는 곳에 서있는 것이 자신의 논지를 부각시키기 가장 좋기 때문이다. 그는 대중을 거대한 힘으로 상정하기 힘들기 때문에 '디-빠'라는 다소 위험한 일반화와 범주화를 과감하게 시도했다. 그래서 그들을 다수로 상정하고 그들에게 압박받는 대상에 지성인을 놓아두는 시도가 이어지는 것이다.
▲모종의 '강력한 힘'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하면서 '역사적 사례'라는 고리를 찾는다. 상대보다 더 많이 알고 있으며 자신의 논리가 허황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한 재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중이 인지하는 권위에 의지한다. 그래서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는 말이 근거로 꼭 들어가게 마련이다. 놀랍게도 그가 동원하는 전세계 유수 석학들의 발언은 그의 논점을 뒷받침하는데 소중한 재료들이다. 물론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그랬듯이 개인과 집단의 복잡다양한 자유의지를 외면하는 우를 함께 겪고 있기도 하다.
▲위험하지만 논리 전개에 있어서 비약과 축소, 또는 확대를 자유자재로 구사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어휘는 대부분 '이다'로 끝난다. 서프라이즈식의 '~은 아닐까' 또는 '~일 것이다'는 식의 흐리멍텅한 어법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가 어떤 피해를 어떻게 받고 있는지는 구체적이지 않지만 그는 이미 지성인들을 피해자로 단정한다. 또한 심형래 감독은 '몽상가'이며 대중은 '정신질환을 겪고 있는 환자'다.
따라서 진중권 교수는 논객으로서의 충실한 역할 행동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는 그래서 이미 무지하고 다중적인 대중에 의해 피해를 받고 있는 소수 지성인의 대표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는 것이다.
그는 '지식 장사'를 위한 생업으로 이러한 논란과 논쟁을 즐길줄 안다. 논객이라는 역할 설정을 자임한 이상 이슈가 사그러들기 전에 더 많은 사례와 일반화 논리를 찾아내야 한다. 그런 강박관념이 그를 이렇게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다.
디-워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없었다면 그 역시 논점을 잡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말하는 대중은 언론이 아닐런지.
결국 진중권과 언론은 대중의 관심을 팔고 다니는 '논쟁 판매자'들이다.
**덧, 여기서 그의 글을 새벽까지 탐닉(?)했다. 진중권의 글은 '멋있다'. 이송희일의 저질 논평하고는 차원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