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조금은 건조한 이야기 하나 해볼까 합니다.
미디어법과 관련해 언론사는 물론 정치권도 갖고 있는 전략적 선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전략적 선택에 있어서 정치는 늘 논란을 '주도'해야 합니다. 앞장서서 말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반대나 찬성 밖에 선택지가 없고 이마저도 찬성하면 '배신'의 굴레를 써야 하고 '반대'해봤자 처음으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성과가 제로(0)인 피곤한 게임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여권의 선택은 탁월했습니다.
1. 미디어법을 상정합니다.
2. 미디어법은 큰 틀로 보면 규제를 풀어 경쟁을 높이는 방향입니다.
3. 사업자들은 이런 경쟁 지향적인 규제 해제에 찬성합니다.
4. 사업자들은 주요한 정치자금 수입원입니다.
5. 보수 언론사들이 원래 요구했던 요청이어서 언론사들로부터 지원사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6. 보수 신문사를 지원하는 의혹은 규제를 완화하고 경쟁을 높이는 전체적인 틀에서 큰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너도 하면 되잖아'라고 말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7. 만일 미디어법이 국회에서 부결될 경우 야당의 반대 때문입니다.
8. 하지만 이러한 위기는 내적 단결을 이끌어내고 야당을 향해 불만을 갖게되는 언론을 다시 여당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9. 강행처리했을 경우 돌아오게 될 실질적인 피해는 거의 없습니다. 반대파는 미디어법의 가부결에 영향을 받지 않고 여당을 반대할테니까요.
10. 헌재에서 무효로 판결이 내려졌다 해도 성과가 제로(0)일 뿐 잃는 것은 없습니다. 문제점만 고쳐서 다시 만들고 가결시키면 되니까요. 이기는 게임은 반복적으로 하면 됩니다. 룰은 자기가 만드는 거니까요.
11. 헌재에서 과정은 위법했으나 유효한 법령으로 인정한 마당에 여권과 보수 언론은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다음으로 야권은 전략적인 판단 미스로 인해 완전하게 실패했습니다.
1. 미디어법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2. 미디어법의 경쟁산업화에 대한 큰 틀의 방향성에 반대할 명분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럼 어쩌자는 거야'에 대한 대답은 '그냥 놔두자'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미디어 종사자는 '변하긴 변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3. 여기서 또 최악의 선택을 합니다. 미디어법을 '악'으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4. '악'을 막아내지 못하면 무능력한 것이고 '악'을 막아냈다 해도 성과는 원래 그자리인 제로(0)에 불과합니다.
5. '악'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반대의 취지에 동조하는 사람들에게도 '이건 선악의 문제는 아닌데'라며 방임하게 만드는 결과를 빚습니다.
6. '악'이 통과되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는 것은 다른 모든 정부의 정책적인 수단을 물리력으로든 적법한 투표로든 막아낼 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7. 설령 막아낸다고 해봤자 보수 언론사들이 바라는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신문사업을 죽이기 위한 음모론에 시달리게 됩니다.
8. 야권에서 나중에 정권을 잡는다고 해도 신문 개혁이니 방송 개혁이니를 따질 명분이 없어집니다. 지금 여권의 움직임에 적극적인 토론을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9. 헌재에서 무효로 판결 내려졌다 해도 그동안 보여주었던 무능력함에 대한 실망감을 추스릴 수도 없습니다. 판결의 주체는 헌재일 뿐이지 야당의 '의도대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10. 헌재로 끌고간 것 자체가 문제였습니다. 국가 최고의 법리적 해석 주체인 헌재가 유효하다고 한 마당에 이제 더이상 투쟁할 어떠한 수단이나 명분도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법'대로가 얼마나 무서운지만 느끼게 됩니다.
11. 애초에 미디어법은 정치적인 이슈일 뿐 민생법안도 아니었기 때문에 국회의원들끼리 사생결단 싸우면 '귀찮은 반대를 위한 반대자' 위치만 공고해질 뿐이었습니다.
12. 차라리 미리 꺼내들고 대안을 부각시켰어야 했지만 대안을 보니 한나라당에서 보여준 속내랑 별반 다를 것 없이 자기들 유리한 쪽으로만 만들었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왜 이거 갖고 이러지?' 정도의 반응만 나타낼 따름입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야권의 전략적 선택은 완전히 지는 퍼펙트 루즈 게임에 참여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야권과 시민단체의 미디어법에 대한 대응은 안일하고 무식했으며 전략적으로 완전히 패배의 경우에 올인한 격이었습니다. 이긴다고 해도 성과가 결국 문제가 많은 현 체제 그대로인 게임을 했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헌재 판결에 어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헌재 입장에서는 어차피 헌재 판단의 권위를 다시 검증하고 판단해줄 어떠한 권력기관도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상태에서 어떠한 선택을 하든 전략적인 선택의 관점에서 헌재는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헌재 판결이 정치적인 판단이 개입되어 있을 수 있다고 생각은 들지만 그렇다고 '악마적 판단'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오버입니다.
그럼에도 전 헌재가 원래 맘에 안 들었습니다. 뭐죠? 3권분립의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이 옥상옥의 이상한 최고 원로회의는?
링블로그의 미디어법 관련 글 :
2009/08/13 미디어법 사태 이후 지방지 위기, 돌파구는 없나
2009/07/29 국민이 오해하는 언론법?
2009/07/27 미디어법, 미래를 대비한 법이어야 한다
2009/07/24 미디어법의 비즈니스적 허구성 [동상이몽]
2009/07/07 언론사가 직면하게 될 또다른 미디어 변화
2009/02/25 상식이 엎어진 대한민국, 언론법 직권상정
2008/12/30 언론법 개정, 잠깐 드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