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망명, 선언에 불과하다

Column Ring 2009/06/22 11:01 Posted by 그만


장면 #01

사이버 망명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하다. 변희재 빅뉴스 대표가 명예훼손을 당했다며 다음에 둥지를 튼 진중권 교수의 블로그의 게시물을 임시 차단하는 조치를 요청했고 다음은 지체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진중권 교수는 구글이 운영중인 블로그스팟으로 '망명'을 떠났다.

장면 #02

PD수첩 광우병관련 프로그램을 집필한 김은희 작가의 이메일을 압수수색한 검찰이 내용을 대중에게 공개하면서 논란의 불씨를 당겼다. 검찰은 김은희 작가의 이메일을 분석해본 결과 반정부적인 성향과 편향적인 프로그램을 만들 '의도'가 명백하다고 주장하고 있고 대다수 네티즌들은 검찰의 저열한 망신주기 수사에 어이 없어 하고 있다.

이로 인해 사생활 대화 내용을 정부가 멋대로 열어볼 수 있다는 위기감에 해외 이메일로 계정을 바꾸어야 한다며 이메일 '망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메일 뒤집어까기, 실명제니까 가능하지
사이버 망명, 심지어 사이버 건국에 이르는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인터넷 역사에 등장하는 소재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정부와의 적절한 선에서의 합의 규제를 도입하는 선에서 논란이 봉합되곤 했다. 정부로서도 범죄와 음란물로부터 국민과 선량한 시민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해야 했고 사이버 시민들(네티즌)로서는 민주주의에서 '사적 통신'에 대한 제재는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는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받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인터넷 기술적 개념은 하나이지만 나라와 사회마다 다양한 기준을 준용하고 있어 인터넷은 온갖 시련을 당하고 있는 중이다. 중국에서는 거대한 방화벽을 쳐 놓아 외부로부터의 정보 유입을 통제해왔고 미국은 테러와 전쟁한다며 거대한 모니터망을 인터넷 안에 심어 국민들의 통신을 수시로 감청해왔다.

우리나라는 이미 법적으로 영장을 청구하기도 전에 ISP들로부터 사적 통신 매개체인 이메일 계정을 압수수색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춰놓았으며 상시적으로 범죄의 조짐이 보이면 감청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해놓았다. 최근에 들어서 통신비밀보호법에서 감청대상자에게 서면으로 감청 사실을 통보해줄 것을 법적으로 마련해놓았으나 이마저도 검찰은 교묘하게 비켜가고 있다. 검찰은 개인의 이메일 압수수색 등 통신 제한 행위를 하면서도 형사소송법이나 전기통신법에는 서면 통보 요건이 갖춰져 있지 않아 통신비밀보호법은 무시한 채 형사소송법과 전기통신법만 준용하고 있는 상태다.

법이 얼마나 권력자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주물러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이다.

** 덧, 댓글로 이 문제에 대한 통신비밀보호법 조항 신설 내용을 알려주셨습니다. 이 조항은 지난 4월 임시국회에서 통과되어 5월말부터 시행됩니다.

SadGagman 
법이 개정되어서 이제는 이메일 압수의 경우에도 통지는 해주어야합니다.
통신비밀보호법 제9조의3 (압수ㆍ수색ㆍ검증의 집행에 관한 통지) ① 검사는 송ㆍ수신이 완료된 전기통신에 대하여 압수ㆍ수색ㆍ검증을 집행한 경우 그 사건에 관하여 공소를 제기하거나 공소의 제기 또는 입건을 하지 아니하는 처분(기소중지결정을 제외한다)을 한 때에는 그 처분을 한 날부터 30일 이내에 수사대상이 된 가입자에게 압수ㆍ수색ㆍ검증을 집행한 사실을 서면으로 통지하여야 한다.
② 사법경찰관은 송ㆍ수신이 완료된 전기통신에 대하여 압수ㆍ수색ㆍ검증을 집행한 경우 그 사건에 관하여 검사로부터 공소를 제기하거나 제기하지 아니하는 처분의 통보를 받거나 내사사건에 관하여 입건하지 아니하는 처분을 한 때에는 그 날부터 30일 이내에 수사대상이 된 가입자에게 압수ㆍ수색ㆍ검증을 집행한 사실을 서면으로 통지하여야 한다.
[본조신설 2009.5.28]



물론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여론의 온도 차이도 검찰의 일관성 있는 '이메일 뒤집어까기'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2006년 당시 검찰은 황우석 교수와 관련된 33명의 이메일 5만여 건을 입수해 분석했다고 말했다. 다들 그것이 진실을 밝혀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이메일 입수 경위나 왜 33명이나 되는 엄청난 사람들의 이메일을 들여다 봐야 하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신정아 사건 때도 검찰은 사적인 이메일 내용을 공개적으로 흘렸고 언론은 신나서 인용 보도했다. 최근에는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 나섰던 주경복 후보의 이메일을 7년씩이나 뒤지는 검찰의 쌍끌이 방식의 수사에 입이 떡 벌어질 뿐이다.

사이버 망명, 그 허망한 이름이여...
그런데 따지고 보면 검찰이 어떻게 개인의 이메일을 특정해서 압수수색할 수 있었을까. 간단하다. 포털 등 서비스 업체들이 보유한 개인 실명 데이터와 매치 돼 있는 계정을 특정해 복사해오면 끝이다. 그리고 수없이 주고 받은 내용 가운데 한 두개를 골라 언론에 슬쩍 흘리면 여론재판이나 여론물타기가 손쉽다. 이게 우리나라 최고 엘리트 집단인 검찰이 하고 있는 행동이며 이런 행동이 가능하게 만들어준 분들이 실명제를 찬성해주신 네티즌 여러분 국민이다. 물론 자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여기는 국회의원 나리들과 정부 관료들의 합작품이다.

정부의 이같은 조치가 맘에 들지 않고 반대로 정부는 네티즌의 요리조리 빠져 나가기 식의 여론몰이에 심기 불편한 사이, '사이버 망명'이란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이버 망명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해주어야 할 것 같다. '소용 없다'

일단 전 국민이 모두 실명제가 적용되지 않는 사이트의 국내 서비스 계정을 사용하거나 해외 계정을 이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린 이메일을 보내고 받기를 내 계정에서 하더라도 결국 상대방과의 통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를 중심으로 한 모든 통신 대상자들은 안전하지 않게 된다.

또한 진중권 교수 처럼 해외 사이트 블로그를 이용한다면 명예훼손 글로 인한 임시 조치는 피할 수 있을 지언정 '명예훼손' 행위 자체는 그대로 남게 되고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이상 글을 쓴 사람을 처벌하는 '속인주의'의 우리나라 법 체계상 망명이라고 불리기도 힘들다.

물론 해외 사이트에 글을 써 놓고 나중에 문제가 생긴다면 '내 글이 아니었다. 남이 나를 도용한 것이다'라고 하면 빠져 나갈 방법이 생기지만 이마저도 처음부터 자기 글이 아니었음을 명시하거나 최소한 자기 글이라는 언급 자체를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이버 망명은 임시 조치를 피한다는 의미 외에는 법적인 처벌이나 인적 구속, 또는 규제로부터 도망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이는 얼마 전 링블로그에서 소개한 아고라 망명 프로젝트 역시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현 상태로라면 정부가 '작정하고 걸면 걸리게 돼 있다'

그렇다면 '망명'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안전한 소통 방법'은 없는 것일까? 있다. 귀찮을 뿐이지만 없을 리가 없다. 이는 인터넷 전도사이자 구글 부사장이기도 한 빈트 서프가 인터뷰[한겨레신문]에서 말한 것 처럼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려는 정부의 모든 시도들은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용자들은 정부의 표현의 자유 제한을 피해서 표현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나설 것이다."

새로운 방법이란 특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터넷 초기의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언뜻 생각해도 실명제 사이트에서 일단 모두 탈퇴하고 이메일을 해외 계정으로 하나 만들고 이메일과 IP를 수시로 바꾸며 통신하면 된다. 철저하게 익명으로 살아야 한다. 내가 나라는 흔적을 남기면 안 된다. 자유롭게 말하기 위해 스패머나 해커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누가 선량한 네티즌을 사이버 유랑민으로 몰아가고 있는가. 인터넷 실명제부터 왜곡되기 시작한 국내 인터넷 보안과 개인정보보호 정책이 결국 국내 인터넷 산업에 더 큰 피해를 주고 있다.

이렇게 허망하다 못해 거의 쓸모 없는 '망명 선언'이라도 해야 속이 편한 상황을 누가 초래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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