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1학년, 92년이었다.
'스타 탄생' '특종 TV 연예'라는 방송 프로그램이 있었다. 신인들 나와서 자기 솜씨를 뽐내고 기라성 같은 선배 가수, 연예인, 평론가로부터 조언과 비판을 받는 프로그램이다. 물론 어디서 배낀 프로그램이었다.(일본 무슨 프로그램이었던 거 같은데... 그 전부터 있었던 미국 케이블TV의 전형적인 '신인 조지기' 프로그램이었다.
**
Jiinny님께서 트랙백으로 잘못된 내용을 지적해왔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서. (잘못된 내용을 지적해주신 Jiinny님께 감사~^^)
"하지만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서태지의 등장과 관련된 소개는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군요. 전 91학번 서태지의 등장에 못지않게 충격적이었던 사람입니다. 서태지는 정확히 "특종TV연예"의 신곡무대라는 곳이었습니다. 글쓰신분 말씀대로 비판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패널이 작사가, 작곡가, 지금은 방송인으로 활동하시는분 그리고 가수 전영록씨였습니다. (비판적이었던 분 이름은 뺐습니다.) 하지만 비판적인 내용은 그들로서는 이해가 가는 방향이었던 것이 가사와 멜로디가 약하다였습니다. 역시 립싱크였구요. 그 특유의 현란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안무는 사실 제가 봐도 한눈에 "얼어 있어서" 제대로가 아니었다입니다. 얼굴은 긴장한 표정이 역력하구요. 동작도 굉장히 경직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수인 진행자 임백천씨와 전영록씨는 꽤 호의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전영록씨는 서태지가 시나위에서 베이스친 것도 알고 머리깍고 이쁘게 나오니 굉장히 미남이다라는 농담도 하지요."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3인조 그룹이 '난 알아요'라는 생전 처음 들어봤음직한 음악을 들고 나왔다. 패널들은 제대로 조졌다. '한국어로 랩을 한다는 게 어색하기 짝이 없다', '안무가 너무 유치하다. 복장도 그렇고 방송에 부적합하다', 등등..
하지만 당시 93년부터 미국에서는 'X세대'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었고 일본에서는 '신인류'라는 신조어가 나오더니 바로 국내 멍청이 언론들은 고대로 따라 '신세대'라는 희한 찬란한 작명을 하면서 내 또래들을 그룹화시켰다.
그렇게 90년대 초반 학번, 70년대 초중반 태어난 이들은 신 종족 마냥 불려졌다. 누구도 우리가 무엇인지 규정하기 힘들었지만 언론과 함께 사회가 대략 그렇게 우리를 규정지었다.
탈냉전의 시대, 학생운동의 막바지 몸부림, 광주민주화항쟁 사건의 다시보기, 민주 세력의 승리와 분열, 그리고 이어지는 김대중 김영삼의 단일화 실패, 김영삼의 좌우합작의 변절, 연세대 한총련 사태가 그 시대를 걸어가고 있던 이들에게 늘 충격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사회의 흐름을 대변하는 탈 권위주의의 새싹은 서태지부터였다. 그는 대학을 나오지도 않았고 엘리트 코스를 밟지도 않았으며 음악계의 큰 줄기를 따라 육성된 적도 없는 '성공의 아이콘'이었다.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판을 6개월에서 1년마다 한 장씩 찍어내는 공장 시스템을 거부하고 서태지식 음반 출시 전략, 즉 활동 중단-잠적-복귀로 이어지는 새로운 흐름을 온몸으로 만들어냈다. 새로 만들어내는 음악들 역시 그렇게 따라부르기 힘들었지만 꾸역꾸역 따라부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당시 대학 문화들 역시 당구장과 만화방이란 놀이문화 집결지에서 노래방이 등장하고 비디오방이 전국을 휩쓸며 시대와의 단절을 무의식적으로 즐기는 문화로 바뀌고 있었다. 음습한 막걸리에서 소주로 그리고 다시 맥주로 주종도 바뀌고 선배들과 사회에 대해 치열하게 싸우기보다 조용히 워크맨으로 혼자 음악을 들었다.
우리들이 보는 서태지는 동질감이었고 사회에 대한 조용한 혁명을 준비하는 투사였으며 눈으로 보이는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적들의 심장 속 깊숙이 들어가 그들에게 혁명의 기운을 전파시키는 세력쯤으로 보였다.
우리라고 할 것도 없다. 내가 그랬고, 체험과 실천이 중요한 가치임을 깨닫는 시기였다. 머리만으로 생각하는 혁명과 구호를 외치며 충돌의 가치만으로 경도된 개혁 방식은 그래서 가치를 잃었다.
90년대 이전 민주화 세력이라 뭉뚱그려 이야기 하지만 당시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은 나름의 비제도권 영웅을 만들어 제도권의 거악과 대결시켰다. 저쪽에 거두가 있으니 우리에게도 거두가 필요했다는 식이었다. 386의 한계는 새로운 종류의 보스 만들기였다고 느꼈다. 다양성과 개성의 가치가 훼손되더라도 거악과 싸우기 위해서는 학생운동 조직 역시 민주화된 토론보다 집단 세력화와 의식화에 몰두하기 일쑤였다. 그것은 그때의 힘이었다.
서태지 세대는 성장해서 97년 IMF 사태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부패 세력의 재집권을 막아내었고 386의 가치를 실현시켜주기 위해 정치권의 서태지였던 노무현에게 동전이 가득 담긴 돼지저금통을 던져줬다. 인터넷이란 새로운 매체를 자유자재로 다룰줄 알았던 우리는 서태지를 여전히 영웅으로 만들고 있으며 우리가 원하는 누구든 우리를 대신할 수 있는 누구든 영웅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늘 흩어져 있다. 속내를 쉽게 흥분하며 떠들고 다니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믿었고 누구도 믿지 않는 음모론의 신봉자들이었으며 다들 누구나 잘났다고 인정할 수 있었으나 인정하지 못할 경우에는 어떻게든 장기적으로든 부정기적으로든 저항해왔다.
순진했을까? 부패수구세력에게서 느낀 실망감, 386에게서 느낀 실망감은 거악에 맞서기 위한 차악이 스스로 되어버린 것을 목격하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선택의 시간이 왔다.
지역주의를 처음으로 극복한 세대, 만화도 문화라고 인정하는 다양성 존중의 세대, 꾸준한 관심보다 부정기적인 폭발성을 가진 세대, 디지털을 수족처럼 다루는 세대, 개인화와 사회 공동체 의식 사이에서 선택을 즐기는 세대, 주군이 아닌 리더를 원하는 세대, 나라가 부패로 망할 때 어떻게 사회적인 피해가 파급되는지 눈으로 본 세대, 교복두발 자율화 세대...
그게 나와 우리 세대를 이야기해준다.
살려주이소 하는 젊은이들보다 부딪히고 깨지는 젊은이들과 어깨동무하고 싶은 청춘세대, 도덕보다 능력이라는 삽질 아버지 세대에 대한 존경심 뒤에서 그들의 거대한 부패 덩어리에 몸서리칠줄 아는 개인주의 세대들이다.
그런 내가 오늘 차악에게 한 표를 던지고 왔다. 최선이라 생각했던 문국현 후보를 순수하게 보기보다 내 주관적으로 봤을 때 신선하지 않은 구세력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그에게 내가 원하는 언론개혁의 의지나 사회 기득권을 설득시킬 힘을 찾지 못해서였다.
하지만 누구의 어떤 선택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 노태우가 집권하고 나서 김영삼이 집권하는 과정을 지켜봤고 그것을 역전시킨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흘러가고 동지들은 세대를 넘나들며 활동하고 있으며 사회가 주목하는 인물들로 서태지 세대들이 움직이고 있다. 끊임없는 자기 부정을 통한 혁신으로 벤처의 주역이 되어 있으며 탈 지역주의 탈 냉전주의 탈 권위주의는 우리의 지상 과제다.
권영길, 문국현, 금민에게도 마음을 열어두고 있는 이들이 서태지 세대들이다.
누구에게 무슨 표를 던지든 그것이 역사고 그것을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자. 다만, 부패 세력이 나라의 주인행세를 할 때는 서태지 세대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언제든 생활 투사로 활동할 능력과 경험이 쌓이고 있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민중 속에 개혁이 있다고 믿는 서태지 세대의 일원의 비겁한 변명이다.
**덧, 이 글을 급하게 마무리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서태지 세대에 대한 설명, 그리고 그 문화 아이콘으로 설명되는 세대에 대한 이야기가 불편하신 분이 많은가 봅니다. 희한하시네, 제가 서태지가 좋다고 했나요? 아무리 읽어도 그렇지 않은데.. 다만 그가 시대상을 대표하는 아이콘이라는 점을 설명하는 겁니다. 섞이기 싫다고 73년생이 77년생이 되는 게 아니듯이.. 데모하지 않아도 80년 민주항쟁을 거쳤듯이.. 하튼 달을 가르키면서 딴 이야기하고 있는데 손가락이 못생겼다고 하시면 절망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