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관련 글 하나 썼다가 제대로 트래픽 폭탄을 맞고 연이어 망가지는 회사 감잡기 글에 트래픽 폭탄을 맞고 보니 이제 약속한대로 10년 전 이야기를 다시 꺼내야 할 때가 된 거 같습니다.
10년 전 보험 회사를 그만 두고 바로 잡지사로 옮긴 이야기는 해드렸구요. 연이어 그 다음 버전입니다.
10년 전 그만의 전공이 신문방송학과이다 보니 '기자' 또는 'PD'에 대한 열망이 높았습니다. 그런데 졸업 즈음 해서 보니 어차피 언론사 가운데 저 처럼 능력 없는 사람을 뽑을 곳이 눈에 보이지는 않더군요. 실제로 주요 언론사들은 1998년, 1999년 공채가 사라진 시점이기도 하고 일부 있다고 해도 살인적인 수백대 1의 경쟁률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PC통신의 취업란을 열심히 뒤져서 찾아낸 곳이 <PCㅇㅇㅇ>라는 잡지사였습니다. 예전부터 컴퓨터에 대한 관심도 많았고 나름 PC 잡지를 탐독해왔던 터라 그만으로서는 '아, 여기서부터 시작할 수 있겠다' 싶어서 원서를 냈습니다.
아직 졸업 전이었던 그만은 별로 내세울 것이 없어서 컴퓨터 학원(Auto-CAD) 수료증을 하나 달랑 내밀 수밖에 없었죠. 군대 가기 전에 따놓은 운전면허야 어디 써먹을 곳은 없었지만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더 써야 했기에 포함시키긴 했죠.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원서 넣고 면접 두 번 정도 하고 나니 ^^ 덜컥 붙더라구요. 당시 다니던 보험회사를 정리하고 나서 출근을 시작했습니다. 그 짧았던 첫 기자로서의 직장 경력을 주저리주저리 말씀드리기 뭐하니 에피소드 몇 개를 소개합니다.
프롤로그. 신문지만 주세요.
면접 볼 때 이야기 하나 덧붙이면요.
'회사 사정 어렵다, 기자들 야근 잦다, 원래 잡지사는 밤 새는 일이 많다. 해낼 수 있느냐'고 하대요. 그래서...
'신문지만 주세요. 사무실에서 깔고 덮고 하면서 해내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학교 때 그러잖아요. 자신있게 어떤 난관도 이겨낼 수 있는 각오를 보여주라고.. 그런데,
맙소사 실제로 그런 환경일줄이야. 큭..
에피소드 1. 첫 출근, 세 달만에 50만원 첫 월급
직장 선후배들로부터, 또는 보험회사 첫 직장 때부터 들은 이야기가 '첫 출근 날 직장 선배들이 밥은 사준다'였습니다. 그런데 첫 출근 날 10명 정도의 직원들 가운데 5명이 함께 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선배'들이 밥을 사주지 않더라구요.
신입사원이 왔는데 별로 말도 붙이지 않고 썰렁한 것이 분위기 이상하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 회사 임금체불중이더군요. 하학.. 그러고보니 일주일 동안 연봉 계약서도 없고 임금에 대한 설명도 없는 것이 이상해서 함께 들어간 동기와 함께 용기내어 '선배'에게 물어봤죠. 그 선배라는 사람들, 한 달 먼저 들어오고 15일 먼저 들어온 사람들인데 대답이 가관입니다. '우리도 그 이야기 못들었어요. 어쨌든 첫달 월급이 안 나오네요'
허걱, 그래도 몇 달 더 있었다는 미술부 팀장에게 살짝 물어보니 돌아오는 대답이란 게 "지금 세달 째 못받고 있다'였습니다. 맙소사...
이러니 당연히 신입사원이라도 밥을 사줄 수 없었던 것이죠. 그로부터 3개월 후 수습을 떼었다며 50만원을 주더이다. 그리고 두 달 후에 70만원 다시 세 달 후에 30만원, 그렇게 제가 9개월 여 동안 받은 돈은 무려 150여만원.. 간간히 취재비라며 10만원씩 주던 돈까지 합쳐서 말이죠. 물론 체불 임금은 퇴직할 때 정산도 제대로 못 받았습니다.
에피소드 2. 습관화 된 사람 뽑고 자르기
이 잡지사에 선배들이 실종된 것은 제가 들어가기 전 한 두달 전. 모두 짐을 싸고 나갔다고 하더군요. 어쩐지, 제가 면접을 볼 당시에 기억나는 사람들 가운데 출근 하고 나서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선배들이 모두 나간 것은 그 전에 실시된 편집장 인선이 주요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편집장으로 온 사람이 원래 주간(발행인)이 알던 업체 사람이었는데 광고국장으로 들여왔다가 편집장과의 불화 이후 편집장까지 자리를 맡긴 것이었죠.
모두 물갈이가 된 상황에서 기자라고는 한 달 짜리 한 명 , 보름 짜리 한 명, 그리고 저 포함 신입 두 명이었던 것입니다! 정말 난감했죠. 사실은 제가 들어가고 나서도 수십명(몇 달 동안 족히 20명이 넘는 사람)이 회사에 기자나 광고부, 미술부로 들어왔다가 나가버립니다. 경리는 제가 있을 동안 무려 4번이나 바뀌었죠
그런데 제발로 나간 사람은 그렇다고 쳐도 열심히 일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편집장이 내보내더군요.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 마감을 제대로 못 지킨다, 능력이 떨어진다 등등 이유는 갖가지였으나 통보는 '내일부터 나오지 마'라는 말이 전부였습니다. 또는 나가지 않겠다며 울고 있는 직원에게 욕설을 하고 물건을 집어 던지는 모습을 현장에서 목격해야 했습니다.
끔찍했죠. 그렇게 내보내고 다시 새로 받아들이기를 수 차례, 적게는 두 달 많게는 6개월 일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전 버텨야겠다고 생각했고 다행히 제 동기와 전 잘리진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이서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는 기자들의 분량을 담당해야 하는 상황이라 내보내기도 힘들었겠죠. 덕분에 동기와 전 둘이서 적게는 60페이지, 많게는 1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에피소드 3. 1만 개 스티커 붙이기
첫달 마감을 힘겹게 끝내고 나서 미술부로 원고를 넘긴 채 다음달 기획을 위해 이리저리 책을 뒤지고 있는데 주간님과 편집장이 부르더군요. 뭔가를 산더미 처럼 쌓아놓은 채로.
아.. 기억나십니까? 당시 PC 잡지들은 테스트용 쉐어웨어, 프리웨어 프로그램들을 CD로 담아주었죠. 그 때 PC통신 전용 브라우저를 그 안에 넣어주는데, 한 달에서 세 달짜리 테스트용 임시ID를 잡지사에 제공했었죠. 아아.. CD에 그 임시 ID가 적힌 스티커를 일일이 붙여야 했습니다.
무려 만 개 였습니다.(솔직히 세어보진 않았습니다. 직원들에게도 부수를 숨겨서..) 정말 인형 눈알 붙이듯이 하는 작업을 온 직원이 모여서 이틀 동안 마감중에 끝내야 했습니다. 그동안 무료ID가 안 된다고 불평하던 제 모습이 겹쳐지더군요. 하핫..
에피소드 4. 1000원 남은 5000원권 지하철 패스가 취재비
지금이야 교통카드가 있지만 당시에는 지하철 패스로 지하철을 이용해야 했습니다. 어차피 월급도 안 나오는 상황에서 취재비를 요구할 엄두도 안 났습니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취재를 나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언젠가 인터뷰를 나가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머니에 동전 몇 개가 전부인 상황, 드디어 편집장에게 말했죠. '취재해야 하는데 나갈 돈이 없다.'
편집장이 '남 모르게' 제 손에 지하철 패스를 쥐어주더군요. 5000원권(실제 사용액은 5500원이었던 거 같은데요) 지하철 패스였습니다. 아, 이 정도면 몇 번 나갔다 돌아오는데 문제는 없겠구나 싶어서 들고 나갔습니다. 맙소사. 지하철 패스에는 잔액이 1000원, 회사로 되돌아올 때 패스는 없었습니다. 지하철 개표기가 먹었으니까요.
에피소드 5. 압류딱지, 신입사원에게 숨기기
몇 달이 지났을까요. 여전히 PC통신 채용란에는 이 잡지사 채용 공고가 있었고 매달 몇 명씩 면접을 보러 옵니다. 몇 달 후 신입 사원을 뽑았습니다. 마감 휴가(마감이 끝나고 책이 발간되기 직전 하루 이틀 정도 쉽니다) 후 그 사람이 출근하기 전날 회사로 나가보니... 입이 떡 벌어지더군요.
사무실 모든 집기에 주황색 압류 딱지가 붙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핫.. 이 회사 드디어 망하나 보다 싶었죠. 그런데 태연하게(제가 보기에 그랬습니다. 몇 번 당해봤다는 식의) 그 딱지들을 떼어내거나 가리더군요. 그러면서 제게 주간이 '신입사원이 못보게 잘 떼어내라'고 하더군요.
다음 날, 신입기자가 첫 출근합니다. 그런데 자리를 배정해주고 나서 신입기자가 갑자기 '이건 뭐에요?'라며 모니터 뒤에 붙어 있던 딱지를 보여주더군요.
'아차'.. 사무실에 정적이 흐릅니다.
그리고 나서 편집장이 그 딱지를 휙 낚아 채더니 '별거 아냐, 서류상 문제가 있어서 잘못 붙여놨던 건데...'하면서 제게 눈을 흘기더군요. 저는 그때 죄인이 되어버렸습니다. 하핫.. ^^
에피소드 6. 야식의 기적, 5000원으로 13명을 배불리 먹이다
겨울이 됐습니다. 흔한 온풍기 하나 없어서 난로를 때웠죠. 가끔 기름을 사올 수 없는 날은 며칠씩 사무실에서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시린 손을 PC 냉각기 앞에 가져가 녹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늘상 반복되는 야근, 한 일주일 정도만 정상 출퇴근(그것도 약속이 있으면 회사에서 자야 했죠) 나머지는 모두 회사에서 먹고자야 했습니다.
점심 때 계약된 식당이 두세달에 한 번씩 바뀌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계약된 식당에 돈을 주지 않아서 다른 식당으로 갈아타는 바람에 직원들 모두 무전취식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상황이 이래도 야식은 먹어야겠기에 야식비를 갹출해서 라면, 빵, 음료수 등으로 때워야 했죠. 어느 날 다들 임금 체불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아무도 돈이 없는 상황이 발생하자 직원들은 다시 제게 눈짓을 합니다. '편집장에게 야식비 좀 타내라'는 신호죠.
편집장에게 야식비를 이렇게 몇 번 타냈습니다. 물론 편집장의 사비였던 거 같습니다. 한 번은 야근자가 13명(경리와 주간님을 뺀 나머지 직원 모두)이었는데 5000원을 주더군요. 하핫.. 편의점에 가서 이거로 어떻게 배불리 먹일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가끔 1만원을 받아 갈 때도 있었습니다) 컵라면은 살 수도 없고 빵과 음료수는 너무 질리고.. 결국 그날 이후로 끓여 먹는 라면 대여섯개를 사왔습니다. 빵과 음료수도 몇개 곁들여서 말이죠. 나중에 들어온 눈치 없는 팀장이 제게 라면 끓이는 담당을 시키더군요. 맛있게 끓인다고. 참고로 저는 라면을 잘 못먹습니다. 먹으면 체해서..
추운 겨울 사무실 중앙의 난로위에 냄비를 놓고 13명분의 라면을 끓여야 했습니다. 한 번에 끓일 수 없으니 3, 4번 나눠 끓여야 했죠. 새벽 4, 5시에 책상에서 잠든 직원들은 아침이 되어 얼굴이 두배로 불어나더군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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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생각을 하니 감회가 새롭긴 한데요. 좀 괴롭기도 하네요..^^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 뿐이라서요.
지금이야 이렇게 어영부영 시작된 직장생활 10년차를 마무리해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당시 힘들었던 기억은 지금껏 정말 '생존자'의 기분으로 살아남게 만든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새로 시작하는 분들에게 '나 이렇게 고생했다'고 말하지 않아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바로 '나 때는 안 그랬다'는 것이거든요. 너무 잔인하잖아요.--;
10년 전 보험 회사를 그만 두고 바로 잡지사로 옮긴 이야기는 해드렸구요. 연이어 그 다음 버전입니다.
10년 전 그만의 전공이 신문방송학과이다 보니 '기자' 또는 'PD'에 대한 열망이 높았습니다. 그런데 졸업 즈음 해서 보니 어차피 언론사 가운데 저 처럼 능력 없는 사람을 뽑을 곳이 눈에 보이지는 않더군요. 실제로 주요 언론사들은 1998년, 1999년 공채가 사라진 시점이기도 하고 일부 있다고 해도 살인적인 수백대 1의 경쟁률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PC통신의 취업란을 열심히 뒤져서 찾아낸 곳이 <PCㅇㅇㅇ>라는 잡지사였습니다. 예전부터 컴퓨터에 대한 관심도 많았고 나름 PC 잡지를 탐독해왔던 터라 그만으로서는 '아, 여기서부터 시작할 수 있겠다' 싶어서 원서를 냈습니다.
아직 졸업 전이었던 그만은 별로 내세울 것이 없어서 컴퓨터 학원(Auto-CAD) 수료증을 하나 달랑 내밀 수밖에 없었죠. 군대 가기 전에 따놓은 운전면허야 어디 써먹을 곳은 없었지만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더 써야 했기에 포함시키긴 했죠.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원서 넣고 면접 두 번 정도 하고 나니 ^^ 덜컥 붙더라구요. 당시 다니던 보험회사를 정리하고 나서 출근을 시작했습니다. 그 짧았던 첫 기자로서의 직장 경력을 주저리주저리 말씀드리기 뭐하니 에피소드 몇 개를 소개합니다.
프롤로그. 신문지만 주세요.
면접 볼 때 이야기 하나 덧붙이면요.
'회사 사정 어렵다, 기자들 야근 잦다, 원래 잡지사는 밤 새는 일이 많다. 해낼 수 있느냐'고 하대요. 그래서...
'신문지만 주세요. 사무실에서 깔고 덮고 하면서 해내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학교 때 그러잖아요. 자신있게 어떤 난관도 이겨낼 수 있는 각오를 보여주라고.. 그런데,
맙소사 실제로 그런 환경일줄이야. 큭..
에피소드 1. 첫 출근, 세 달만에 50만원 첫 월급
직장 선후배들로부터, 또는 보험회사 첫 직장 때부터 들은 이야기가 '첫 출근 날 직장 선배들이 밥은 사준다'였습니다. 그런데 첫 출근 날 10명 정도의 직원들 가운데 5명이 함께 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선배'들이 밥을 사주지 않더라구요.
신입사원이 왔는데 별로 말도 붙이지 않고 썰렁한 것이 분위기 이상하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 회사 임금체불중이더군요. 하학.. 그러고보니 일주일 동안 연봉 계약서도 없고 임금에 대한 설명도 없는 것이 이상해서 함께 들어간 동기와 함께 용기내어 '선배'에게 물어봤죠. 그 선배라는 사람들, 한 달 먼저 들어오고 15일 먼저 들어온 사람들인데 대답이 가관입니다. '우리도 그 이야기 못들었어요. 어쨌든 첫달 월급이 안 나오네요'
허걱, 그래도 몇 달 더 있었다는 미술부 팀장에게 살짝 물어보니 돌아오는 대답이란 게 "지금 세달 째 못받고 있다'였습니다. 맙소사...
이러니 당연히 신입사원이라도 밥을 사줄 수 없었던 것이죠. 그로부터 3개월 후 수습을 떼었다며 50만원을 주더이다. 그리고 두 달 후에 70만원 다시 세 달 후에 30만원, 그렇게 제가 9개월 여 동안 받은 돈은 무려 150여만원.. 간간히 취재비라며 10만원씩 주던 돈까지 합쳐서 말이죠. 물론 체불 임금은 퇴직할 때 정산도 제대로 못 받았습니다.
에피소드 2. 습관화 된 사람 뽑고 자르기
이 잡지사에 선배들이 실종된 것은 제가 들어가기 전 한 두달 전. 모두 짐을 싸고 나갔다고 하더군요. 어쩐지, 제가 면접을 볼 당시에 기억나는 사람들 가운데 출근 하고 나서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선배들이 모두 나간 것은 그 전에 실시된 편집장 인선이 주요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편집장으로 온 사람이 원래 주간(발행인)이 알던 업체 사람이었는데 광고국장으로 들여왔다가 편집장과의 불화 이후 편집장까지 자리를 맡긴 것이었죠.
모두 물갈이가 된 상황에서 기자라고는 한 달 짜리 한 명 , 보름 짜리 한 명, 그리고 저 포함 신입 두 명이었던 것입니다! 정말 난감했죠. 사실은 제가 들어가고 나서도 수십명(몇 달 동안 족히 20명이 넘는 사람)이 회사에 기자나 광고부, 미술부로 들어왔다가 나가버립니다. 경리는 제가 있을 동안 무려 4번이나 바뀌었죠
그런데 제발로 나간 사람은 그렇다고 쳐도 열심히 일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편집장이 내보내더군요.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 마감을 제대로 못 지킨다, 능력이 떨어진다 등등 이유는 갖가지였으나 통보는 '내일부터 나오지 마'라는 말이 전부였습니다. 또는 나가지 않겠다며 울고 있는 직원에게 욕설을 하고 물건을 집어 던지는 모습을 현장에서 목격해야 했습니다.
끔찍했죠. 그렇게 내보내고 다시 새로 받아들이기를 수 차례, 적게는 두 달 많게는 6개월 일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전 버텨야겠다고 생각했고 다행히 제 동기와 전 잘리진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이서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는 기자들의 분량을 담당해야 하는 상황이라 내보내기도 힘들었겠죠. 덕분에 동기와 전 둘이서 적게는 60페이지, 많게는 1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에피소드 3. 1만 개 스티커 붙이기
첫달 마감을 힘겹게 끝내고 나서 미술부로 원고를 넘긴 채 다음달 기획을 위해 이리저리 책을 뒤지고 있는데 주간님과 편집장이 부르더군요. 뭔가를 산더미 처럼 쌓아놓은 채로.
아.. 기억나십니까? 당시 PC 잡지들은 테스트용 쉐어웨어, 프리웨어 프로그램들을 CD로 담아주었죠. 그 때 PC통신 전용 브라우저를 그 안에 넣어주는데, 한 달에서 세 달짜리 테스트용 임시ID를 잡지사에 제공했었죠. 아아.. CD에 그 임시 ID가 적힌 스티커를 일일이 붙여야 했습니다.
무려 만 개 였습니다.(솔직히 세어보진 않았습니다. 직원들에게도 부수를 숨겨서..) 정말 인형 눈알 붙이듯이 하는 작업을 온 직원이 모여서 이틀 동안 마감중에 끝내야 했습니다. 그동안 무료ID가 안 된다고 불평하던 제 모습이 겹쳐지더군요. 하핫..
에피소드 4. 1000원 남은 5000원권 지하철 패스가 취재비
지금이야 교통카드가 있지만 당시에는 지하철 패스로 지하철을 이용해야 했습니다. 어차피 월급도 안 나오는 상황에서 취재비를 요구할 엄두도 안 났습니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취재를 나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언젠가 인터뷰를 나가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머니에 동전 몇 개가 전부인 상황, 드디어 편집장에게 말했죠. '취재해야 하는데 나갈 돈이 없다.'
편집장이 '남 모르게' 제 손에 지하철 패스를 쥐어주더군요. 5000원권(실제 사용액은 5500원이었던 거 같은데요) 지하철 패스였습니다. 아, 이 정도면 몇 번 나갔다 돌아오는데 문제는 없겠구나 싶어서 들고 나갔습니다. 맙소사. 지하철 패스에는 잔액이 1000원, 회사로 되돌아올 때 패스는 없었습니다. 지하철 개표기가 먹었으니까요.
에피소드 5. 압류딱지, 신입사원에게 숨기기
몇 달이 지났을까요. 여전히 PC통신 채용란에는 이 잡지사 채용 공고가 있었고 매달 몇 명씩 면접을 보러 옵니다. 몇 달 후 신입 사원을 뽑았습니다. 마감 휴가(마감이 끝나고 책이 발간되기 직전 하루 이틀 정도 쉽니다) 후 그 사람이 출근하기 전날 회사로 나가보니... 입이 떡 벌어지더군요.
사무실 모든 집기에 주황색 압류 딱지가 붙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핫.. 이 회사 드디어 망하나 보다 싶었죠. 그런데 태연하게(제가 보기에 그랬습니다. 몇 번 당해봤다는 식의) 그 딱지들을 떼어내거나 가리더군요. 그러면서 제게 주간이 '신입사원이 못보게 잘 떼어내라'고 하더군요.
다음 날, 신입기자가 첫 출근합니다. 그런데 자리를 배정해주고 나서 신입기자가 갑자기 '이건 뭐에요?'라며 모니터 뒤에 붙어 있던 딱지를 보여주더군요.
'아차'.. 사무실에 정적이 흐릅니다.
그리고 나서 편집장이 그 딱지를 휙 낚아 채더니 '별거 아냐, 서류상 문제가 있어서 잘못 붙여놨던 건데...'하면서 제게 눈을 흘기더군요. 저는 그때 죄인이 되어버렸습니다. 하핫.. ^^
에피소드 6. 야식의 기적, 5000원으로 13명을 배불리 먹이다
겨울이 됐습니다. 흔한 온풍기 하나 없어서 난로를 때웠죠. 가끔 기름을 사올 수 없는 날은 며칠씩 사무실에서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시린 손을 PC 냉각기 앞에 가져가 녹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늘상 반복되는 야근, 한 일주일 정도만 정상 출퇴근(그것도 약속이 있으면 회사에서 자야 했죠) 나머지는 모두 회사에서 먹고자야 했습니다.
점심 때 계약된 식당이 두세달에 한 번씩 바뀌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계약된 식당에 돈을 주지 않아서 다른 식당으로 갈아타는 바람에 직원들 모두 무전취식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상황이 이래도 야식은 먹어야겠기에 야식비를 갹출해서 라면, 빵, 음료수 등으로 때워야 했죠. 어느 날 다들 임금 체불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아무도 돈이 없는 상황이 발생하자 직원들은 다시 제게 눈짓을 합니다. '편집장에게 야식비 좀 타내라'는 신호죠.
편집장에게 야식비를 이렇게 몇 번 타냈습니다. 물론 편집장의 사비였던 거 같습니다. 한 번은 야근자가 13명(경리와 주간님을 뺀 나머지 직원 모두)이었는데 5000원을 주더군요. 하핫.. 편의점에 가서 이거로 어떻게 배불리 먹일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가끔 1만원을 받아 갈 때도 있었습니다) 컵라면은 살 수도 없고 빵과 음료수는 너무 질리고.. 결국 그날 이후로 끓여 먹는 라면 대여섯개를 사왔습니다. 빵과 음료수도 몇개 곁들여서 말이죠. 나중에 들어온 눈치 없는 팀장이 제게 라면 끓이는 담당을 시키더군요. 맛있게 끓인다고. 참고로 저는 라면을 잘 못먹습니다. 먹으면 체해서..
추운 겨울 사무실 중앙의 난로위에 냄비를 놓고 13명분의 라면을 끓여야 했습니다. 한 번에 끓일 수 없으니 3, 4번 나눠 끓여야 했죠. 새벽 4, 5시에 책상에서 잠든 직원들은 아침이 되어 얼굴이 두배로 불어나더군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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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생각을 하니 감회가 새롭긴 한데요. 좀 괴롭기도 하네요..^^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 뿐이라서요.
지금이야 이렇게 어영부영 시작된 직장생활 10년차를 마무리해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당시 힘들었던 기억은 지금껏 정말 '생존자'의 기분으로 살아남게 만든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새로 시작하는 분들에게 '나 이렇게 고생했다'고 말하지 않아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바로 '나 때는 안 그랬다'는 것이거든요. 너무 잔인하잖아요.--;
2007/12/0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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