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시대에 충실하라

Ring Idea 2007/04/01 23:39 Posted by 그만
세상을 보는 지혜 1
발타자르 그라시안 지음, 박민수 옮김/아침나라(둥지)
23/ 자신의 시대에 충실하라. 비범하고 특출한 사람도 자신의 시대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어울리는 시대를 살았던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적절한 시대에 태어났지만 그 시대를 이용하기까지에는 오랜 기간이 걸렸다. 더 나은 시대에 태어났어야 했을 이들도 있었다. 선(善)이 언제나 승리를 거두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물은 그 나름의 시기를 갖는 법이며, 최고의 천부적 재능도 시대의 흐름을 이겨낼 수 없다. 그렇지만 현자는 하나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가 불멸의 존재라는 점이다. 만약 시대가 그에게 적합치 않다면 많은 다른 시대가 그를 맞이할 것이다.
<세상을 보는 지혜> 내용 중에서
자신의 시대에 충실한가. 흔히 나는 다른데, 지금 이 시대에서 내가 생각하는 이상향은 그 무엇이며 이 시대는 그 이상향에 주목해야 하는데... 라며 좌절하고 있지는 않은지, 또는 시대를 탓하며 자신의 신세를 초라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 보게 한다.

이 책은 97년 누군가에게 선물로 전달했던 책이다. 이후 우여곡절을 거쳐 다시 내 책장에 되돌아 왔다. 8차례의 이사를 거치며 욕실에서 욕조에 빠지기도 하고 창문이 열린 베란다에서 빗물을 맞으면서 퉁퉁 불은 상태다.

다시 쥐어든다. 머리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간지럽게스리 '모든 것은 선과 악이 있으며 선이 승리할 것'이란 헛된 믿음을 주지 않는다. 그보다 현재 내가 무엇을 잘못 생각하는지, 또는 인생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을 하면서 스스로 나태해지는 것을 느끼지 못할 때 자책하는 방법을 일러주는 '잔인한 책'이다.

요즘처럼 일이 꼬여만 갈 때 이 책을 펼쳐 든다. 그리고 아무 페이지나 열어 몇 구절을 읽는다. 답은 없다. 기승전결도 없다.

날카로운 격언에 의해 상처받기를 바라며 책을 들여다보는 이를 매조히즘에 빠질 것만 같은 문구가 온전히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덮는데 몇 장 넘겨보지도 않는다. 이미 수 차례 읽은 책이지만 2번째부터는 절대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할 필요가 없는 책이다.

나를 채찍질할 용도로 이 책을 집어든다. 이미 이 책은 나의 스승이 돼 버렸다. 오늘 '자신의 시대에 충실하라'는 책의 가르침과 '선이 언제나 승리를 거두는 것은 아니다'라는 처절한 현실 인식에 다시 한 번 몸을 추스린다.

그랬다. 그렇다. 그럴 것이다.

내 인생을 관통하는 무언가가 이 문구들과 충돌한다. 하지만 아프지만은 않다. 늦은 휴일 밤, 그렇게 인생을 알려주는 스승의 지혜로운 한 마디에 배가 부르다. 그리고 아직은 배가 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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