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신문이 죽어간다고 난리다. 그런데 누누이 강조했듯이 종이신문이 죽는다고 해서 저널리즘이 죽는 것은 아니다. 미디어란 다수 인간들의 시간과 주목도를 놓고 벌이는 경쟁이라는 점에서 반드시 빈 자리는 채워진다. 다른 종이신문이든, 다른 형태의 매체든 간에 말이다.
그래서 공적 자금 2조원을 투입해 종이신문을 살리자는 최문순 의원의 발상에 적극 반대했던 것이다. 사적 미디어는 절대 좀비 처럼 살려두면 안 된다. 좀비처럼 살아남은 일부 지방지들이 계약직 기자로부터 선입금을 받고 영업을 뛰게 하는 행위를 보면 화가 날 정도다. 이들을 살려 놓으면 공공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겠는가? 절대 아니다. 기존 체제 그대로 가고 경영진의 배만 불려 놓고 폐업과 재창간을 거듭하는 악순환 고리에 빠질 것이다. 기자들은 영업과 취재를 혼용하는 생계형 기자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저널리즘은 생계를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공기업도 아닌 사기업에 공적 기관으로서의 책임을 떠 안기는 사회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대중 매체들이 '사명감을 가진 준 공적 기관' 역할을 해왔다지만 사실상 '영리 기업'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시민사회가 언론의 대형화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럴 것이면 시민사회가 직접 신문을 공짜로 펴내면 될 것을 왜 자꾸 신문사의 칼럼을 놓고 배 놔라 대추 놔라 하겠는가. 그러나 또 반대로 영리 기업에 무조건적인 공적이고 중립적인 역할만을 기대한다는 것도 억지에 불과하다. 아무리 남 이야기라도 돈을 벌 수 있는 구조가 제한돼 있는 상황을 도외시 하면서 비난하면 안 된다. 그건 등록금이 없으면 장학금 타면 되지 하는 소리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대중매체의 비극적인 모순은 시작된다. 사적 기업의 공기관화를 부축인 것은 국민의 요구라기보다 사적 기업인 미디어 기업 스스로가 생존을 위해 공기관처럼 행동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그것은 자발적인 것이기도 했지만 사회가 욕하는 최소한의 덕목이기도 했고 그것이 '생존'과 '번영'을 약속해주는 전략적 선택이기도 했다. '호외'를 무료로 발간하는 등의 행위를 생각해보면 이 모순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길거리에서 호외를 뿌리는 행위는 '사적 기업'으로서의 행동이라기보다 사회적 요청을 받아들인 '공적 기업 역할'로 봐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대중매체를 지탱해 온 힘은 시민사회의 요구에 얼추 맞춰가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우리는 공공의 이익을 우선한다'는 선언적이고 명시적인 원칙을 통해 신뢰를 확보하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매체의 광고 및 수익 영업이 확대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시장의 신뢰가 무너지기 전에 시장의 광고 및 수익 영업의 축소가 먼저 왔고 이는 신뢰를 약간 희생하는 선에서 생존을 갈구하던 신문에게 더 큰 위기로 다가왔다. 신문은 살아 남아야 하고 규모를 키워서라도 생존의 하안선을 확보해야 한다. 남의 밥그릇이라도 빼앗든가 서로 나눠먹어야 할 처지다. 그걸 비난해서는 안 된다. 생존을 위해 하는 노력마저 비난하면 그건 '인간 된 도리'가 아니다.
여기서 '조중동 방송'이 사람들을 세뇌시킬 것이란 일방적인 구호는 잠시 멈추고 담담하게 현재 미디어 시장의 모순들을 바라보자. 좀더 이해한 다음 공격해도 늦지 않는다.
지금의 상황은 미디어법의 본질을 옆으로 미뤄두고 이들의 입장은 수면 아래 감춰두고 온갖 말도 안 되는 구호들이 난무하면서 미디어법은 이미 갈피를 못잡을 운명이었다. 찬성과 반대의 영역이 아니라 어떻게 지속적으로 현실 미디어 상황을 법안에 반영할 것인가를 놓고 출발했어야 했다.
종이신문은 '다매체' 확보가 절실하다, 근데 사회적으로 그다지 급하지 않다
이 역설적인 문제제기에서 모든 문제가 출발한다. 종이신문의 비용 구조에 대해서는 누누히 말했듯이 '장치산업'에 준한다고 봐야 한다. 대규모 윤전기를 돌려서 대량으로 찍어야 광고 단가를 맞출 수 있다. 배포되는 절대량이 적어지면 그만큼 광고주의 선호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넓은 커버리지(사람들에게 접촉되는 범위)의 매체를 선호하게 돼 있다.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중앙집중형 사고는 지역 광고주들마저 종합 전국 일간지에만 광고 물량을 주게 된다. 모든 자원과 정보가 서울을 중심으로 중앙에 집중되다 보니 소위 '읽을 거리'에 속하는 이야기들이 다시 서울로 집중된다. 지방지에서 서울에서 일어나는 소식이 1면 머릿기사가 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한 우리나라 미디어 현실을 보여준다. 서울방송은 지역 방송으로 태어난 회사이지만 정치권은 물론 시청자와 시민, 그리고 언론인들까지 모두 전국방송 취급을 해준다. 심지어 포털 뉴스도 지역 뉴스의 비중은 너무 작다. 사이버 시민저널리즘의 원류라고 생각됐던 오마이뉴스마저 지역소식은 도외시한 채 중앙 정치 싸움 중계에 여념이 없을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지 시장 자체가 위기에 빠졌다. 넘치는 잔 효과를 받아야 먹고 사는 지방지는 이미 고사 직전 단계다. 이 때 종이신문은 두 가지 선택을 해야 한다. 독자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는 것이다. 프레시안이 그랬고 시사인이 그랬고 오마이뉴스마저 이 길을 걷고 있다. 아마도 대형 자본의 지원이 아닌 독자 자본의 지원은 이들 매체를 좀더 선명한 매체로 만들 것이다. 물론 대중 매체는 선명성이 강할수록 외면받으며 니치 미디어로 전락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미 그렇게 되고 있다. 이른 바 '독자 편향이 주는 기회와 함정' 같은 것이다.
대형 종이신문의 경우 그 비즈니스 규모가 독자에 의지하기 힘들다. 대중은 매체 충성도가 낮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고주에게 손을 벌려야 한다. 그런데 광고주는 종이신문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몸으로 느낀다. 그래서 종이신문이 기획하는 것이 '다채널 포트폴리오' 전략이다. 다양한 매체를 만들어 원소스 멀티유즈(불가능하지만)를 기본으로 '종이' '전파' '케이블' '인터넷' '무선' 등의 다양한 매체들에 자신들의 생산력과 유통력을 확산시키기 위한 전략이다. 종이신문은 결론적으로 '종이'를 근간으로 하는 생존 전략을 포기해야 살 수 있지만 만일 다매체화에 성공하지 못하면 '종이'를 버릴 수 없는 모순에 빠져 있는 상태다.
문제는 종이신문의 체질을 변화시키려는 사업 전략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고 종이신문의 생존 전략과 사회적인 요구가 상충되는 지점에 대한 예측이 어긋나고 있다는 것이다. 종이신문이 여론을 독과점하고 있다는 문제제기와 함께 이런 독과점 구조에 다매체 전략을 허용해줄 경우 여론 시장은 몇몇 대형 보수 언론에 날개를 달아줄 것이란 부담감 때문에 종이신문의 '현상유지'나 적극적이 아닌 '최소한의 참여' 정도가 시장의 정서가 되어 있는 셈이다.
종이신문들은 급한데 사회는 타 매체 이용률이 올라가면서 종이신문들과의 정서적인 거리가 워낙 먼 상태다. 잘 나가면서 왜 그리 서두르냐는 것이고, 서두르는 이유는 딴 데 있는 거 아니냐는 의구심인 거다.
결국 '종이'신문이 이뤄온 과거의 여론 독점에 대한 성공이 미래의 생존을 위협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부딪힌 것이다. 종이신문의 종사자들로서는 신문을 구성하는 수많은 콘텐츠 가운데 고작 20%의 내용 때문에 사업적 기반을 확대하려는 전략을 사회적 저항으로 인해 포기해야 한다면 이 역시 억울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통합 미디어 논의가 필요하다
사회가 심한 보혁 갈등을 겪고 있는 시점에 주요 대형 매체들의 성향이 보혁으로 갈리고 비즈니스적으로 중요한 시기임에도 이를 설득할 기반 역시 편향돼 있으니 어떤 식으로 바라봐도 종이신문의 변신은 환영받지 못할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종이매체라는 우물 안 강자, 장년층의 영향력 매체인 조선, 중앙, 동아 등 주요 신문의 경우 애매하게 됐다. 신속하게 다매체 포트폴리오를 완성하지 못하고 인터넷과 TV의 영향력 시장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사업적 기반 자체가 붕괴될 위기에 빠져 있는 것이다. 문제는 타 매체 시장을 키울수록 자신의 전통적인 영향력 기반인 '종이' 매체의 임종을 앞당겨야 하는 상황을 맞이해야 한다. 신문은 이제서야 그 상황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사회는 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공중파 TV는 이미 영향력 시장의 강자다. 하지만 이들의 미래도 그리 밝은 것이 아니다. 미래를 준비해야 할 사양 산업 두 곳의 장벽을 허문다고 해서 일자리가 창출되고 투자가 활성화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산양 산업간의 벽이 허물어지면 기업 인수합병이 활성화되다가 결국 독과점 시장으로 흐르고 이는 다시 효율화란 명목으로 자원 재분배와 함께 일자리가 급격히 줄어드는 '고용없는 성장'이라는 막장 자본주의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이미 우리나라의 미디어 시장으 포화시장이다.
이런 상황에 여당은 정권창출을 도와준 신문에 뭔가 줘야 하는데 뭘 주어야 좋을지 모른다. 그래서 멍청하다는 것이다. 여당이 신문에 선물을 주려면 그 이상의 사회적인 선물을 내놓았어야 했다. 그래야 상호 호혜평등한 것처럼 시장에 신호를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표현의 자유를 대폭 신장시키고 시민저널리즘, 풀뿌리 저널리즘의 육성책을 도와야 했다. 또한 재벌이 들어올 길을 모색할 것이 아니라 미디어 기업들의 '경영'과 '편집권'의 분리에 대한 확실한 보증 위에 사적 자본의 미디어 기업에 대한 투자의 길을 폭넓게 허용해야 했다. 인터넷 규제를 강화하여 종이신문의 새로운 변신을 오히려 방해하면 안 된다. 자연스럽게 규제가 약한 인터넷으로의 이주를 도왔어야 했다.
지상파 시장은 이미 급속도로 매체별 시간 점유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전파당 매체수를 늘리면서도 반대로 방송에 사용되는 전파를 회수하여 새로운 무선 네트워크의 출현에 대비해야 했다. 지상파 방송 시장은 대규모 자본의 투입으로 인해 시장의 과점 선택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공중파를 무한경쟁시키겠다는 발상은 누구 머리에서 나왔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다.)
반면, 지금 상황에서 야당은 막연한 불안감만으로 미디어법을 '악법'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구호만을 남발하고 새로운 미디어 시대를 선도하는 혜안을 전혀 보여주지도 않았다. 프레임 경쟁에서도 끌려다니기만 하면서 말꼬리 잡기로 작게 성공했으나 대세에는 지장이 없는 상황을 만들어 버려 결국엔 졌다. 아니 여당이나 야당이나 모두 수준 이하의 논쟁으로 미디어 시장을 헤집어놓기만 했다. 이건 결국 '정권' 차원에서 미디어를 이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싸우는 100년 전 사고의 재판이 아니고 뭐겠는가. 진영논리로 풀 수 있는 사회적 합의는 단 한 건도 없다. 총체적으로 보든가 구체적인 사안별 접근이 필요했다.
새로운 미디어의 출현이 많아질 것으로 예측하면 오히려 미디어의 정의를 느슨하게 할 필요가 있다. 지나치게 구체화하다 보니 영역별 장벽이 생겨 지금과 같이 그 영역별 교류를 방해하는 문제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플랫폼이 열리면서 디지털 미디어 융합 현상 및 다매체화는 급속하게 진행될 것이고 반대로 미디어 영향력을 다시 쥐게 될 생산자 집단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드세질 것이다.
지금의 '미디어 악법 반대' 'TV 영향력 과점 해소' '신군부 미디어 체제 해체' '여론독점' 등의 구호만 난무하는 싸움이 우리나라의 미디어 시장을 건강하게 하지 않는다. 아무리 '정서의 영역'이라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정서적 구호만 난무한다.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미디어 시장' 또는 '언론 시장' 자체가 왜 국가 경쟁력에 도움이 되어야 하고 글로벌 미디어 그룹으로 성장시켜야 할 뚜렷한 이유가 있는가.
후기 산업사회 전략 논리를 미래 정보사회 전략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하니 정서적 괴리감만 생기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기존의 미디어 관계법을 모조리 폐지 및 통합 대상으로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최소한 1~3년 동안 통합 미디어법을 위한 고민을 해봐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급조되어 억지로 통과시킨 미디어법이 아니라 국민들 스스로가 미디어여도 납득이 될만한 민주주의 미디어 통합법이다.
그래서 공적 자금 2조원을 투입해 종이신문을 살리자는 최문순 의원의 발상에 적극 반대했던 것이다. 사적 미디어는 절대 좀비 처럼 살려두면 안 된다. 좀비처럼 살아남은 일부 지방지들이 계약직 기자로부터 선입금을 받고 영업을 뛰게 하는 행위를 보면 화가 날 정도다. 이들을 살려 놓으면 공공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겠는가? 절대 아니다. 기존 체제 그대로 가고 경영진의 배만 불려 놓고 폐업과 재창간을 거듭하는 악순환 고리에 빠질 것이다. 기자들은 영업과 취재를 혼용하는 생계형 기자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저널리즘은 생계를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공기업도 아닌 사기업에 공적 기관으로서의 책임을 떠 안기는 사회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대중 매체들이 '사명감을 가진 준 공적 기관' 역할을 해왔다지만 사실상 '영리 기업'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시민사회가 언론의 대형화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럴 것이면 시민사회가 직접 신문을 공짜로 펴내면 될 것을 왜 자꾸 신문사의 칼럼을 놓고 배 놔라 대추 놔라 하겠는가. 그러나 또 반대로 영리 기업에 무조건적인 공적이고 중립적인 역할만을 기대한다는 것도 억지에 불과하다. 아무리 남 이야기라도 돈을 벌 수 있는 구조가 제한돼 있는 상황을 도외시 하면서 비난하면 안 된다. 그건 등록금이 없으면 장학금 타면 되지 하는 소리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대중매체의 비극적인 모순은 시작된다. 사적 기업의 공기관화를 부축인 것은 국민의 요구라기보다 사적 기업인 미디어 기업 스스로가 생존을 위해 공기관처럼 행동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그것은 자발적인 것이기도 했지만 사회가 욕하는 최소한의 덕목이기도 했고 그것이 '생존'과 '번영'을 약속해주는 전략적 선택이기도 했다. '호외'를 무료로 발간하는 등의 행위를 생각해보면 이 모순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길거리에서 호외를 뿌리는 행위는 '사적 기업'으로서의 행동이라기보다 사회적 요청을 받아들인 '공적 기업 역할'로 봐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대중매체를 지탱해 온 힘은 시민사회의 요구에 얼추 맞춰가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우리는 공공의 이익을 우선한다'는 선언적이고 명시적인 원칙을 통해 신뢰를 확보하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매체의 광고 및 수익 영업이 확대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시장의 신뢰가 무너지기 전에 시장의 광고 및 수익 영업의 축소가 먼저 왔고 이는 신뢰를 약간 희생하는 선에서 생존을 갈구하던 신문에게 더 큰 위기로 다가왔다. 신문은 살아 남아야 하고 규모를 키워서라도 생존의 하안선을 확보해야 한다. 남의 밥그릇이라도 빼앗든가 서로 나눠먹어야 할 처지다. 그걸 비난해서는 안 된다. 생존을 위해 하는 노력마저 비난하면 그건 '인간 된 도리'가 아니다.
여기서 '조중동 방송'이 사람들을 세뇌시킬 것이란 일방적인 구호는 잠시 멈추고 담담하게 현재 미디어 시장의 모순들을 바라보자. 좀더 이해한 다음 공격해도 늦지 않는다.
지금의 상황은 미디어법의 본질을 옆으로 미뤄두고 이들의 입장은 수면 아래 감춰두고 온갖 말도 안 되는 구호들이 난무하면서 미디어법은 이미 갈피를 못잡을 운명이었다. 찬성과 반대의 영역이 아니라 어떻게 지속적으로 현실 미디어 상황을 법안에 반영할 것인가를 놓고 출발했어야 했다.
종이신문은 '다매체' 확보가 절실하다, 근데 사회적으로 그다지 급하지 않다
이 역설적인 문제제기에서 모든 문제가 출발한다. 종이신문의 비용 구조에 대해서는 누누히 말했듯이 '장치산업'에 준한다고 봐야 한다. 대규모 윤전기를 돌려서 대량으로 찍어야 광고 단가를 맞출 수 있다. 배포되는 절대량이 적어지면 그만큼 광고주의 선호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넓은 커버리지(사람들에게 접촉되는 범위)의 매체를 선호하게 돼 있다.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중앙집중형 사고는 지역 광고주들마저 종합 전국 일간지에만 광고 물량을 주게 된다. 모든 자원과 정보가 서울을 중심으로 중앙에 집중되다 보니 소위 '읽을 거리'에 속하는 이야기들이 다시 서울로 집중된다. 지방지에서 서울에서 일어나는 소식이 1면 머릿기사가 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한 우리나라 미디어 현실을 보여준다. 서울방송은 지역 방송으로 태어난 회사이지만 정치권은 물론 시청자와 시민, 그리고 언론인들까지 모두 전국방송 취급을 해준다. 심지어 포털 뉴스도 지역 뉴스의 비중은 너무 작다. 사이버 시민저널리즘의 원류라고 생각됐던 오마이뉴스마저 지역소식은 도외시한 채 중앙 정치 싸움 중계에 여념이 없을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지 시장 자체가 위기에 빠졌다. 넘치는 잔 효과를 받아야 먹고 사는 지방지는 이미 고사 직전 단계다. 이 때 종이신문은 두 가지 선택을 해야 한다. 독자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는 것이다. 프레시안이 그랬고 시사인이 그랬고 오마이뉴스마저 이 길을 걷고 있다. 아마도 대형 자본의 지원이 아닌 독자 자본의 지원은 이들 매체를 좀더 선명한 매체로 만들 것이다. 물론 대중 매체는 선명성이 강할수록 외면받으며 니치 미디어로 전락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미 그렇게 되고 있다. 이른 바 '독자 편향이 주는 기회와 함정' 같은 것이다.
대형 종이신문의 경우 그 비즈니스 규모가 독자에 의지하기 힘들다. 대중은 매체 충성도가 낮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고주에게 손을 벌려야 한다. 그런데 광고주는 종이신문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몸으로 느낀다. 그래서 종이신문이 기획하는 것이 '다채널 포트폴리오' 전략이다. 다양한 매체를 만들어 원소스 멀티유즈(불가능하지만)를 기본으로 '종이' '전파' '케이블' '인터넷' '무선' 등의 다양한 매체들에 자신들의 생산력과 유통력을 확산시키기 위한 전략이다. 종이신문은 결론적으로 '종이'를 근간으로 하는 생존 전략을 포기해야 살 수 있지만 만일 다매체화에 성공하지 못하면 '종이'를 버릴 수 없는 모순에 빠져 있는 상태다.
결국 종이 신문의 힘과 브랜드를 이용한 사업꺼리를 광범위하게 벌리게 된다. 이런 경우는 유난히 우리나라에서 더 성행하는데, 예를 들어 히트상품 선정이라거나 광고주 유치를 위한 포럼, 컨퍼런스, 00페어, 전람회 등등... 온갖 군데에서 '지면을 통해 알려주겠다'며 부대 사업을 펼친다. 심지어 부동산 중개업, 취업 중개, 교육업, 문화원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다양한 멀티 브랜드 사업을 펼친다.
신문에 2조원을 쏟아붓겠다고? [링블로그]
문제는 종이신문의 체질을 변화시키려는 사업 전략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고 종이신문의 생존 전략과 사회적인 요구가 상충되는 지점에 대한 예측이 어긋나고 있다는 것이다. 종이신문이 여론을 독과점하고 있다는 문제제기와 함께 이런 독과점 구조에 다매체 전략을 허용해줄 경우 여론 시장은 몇몇 대형 보수 언론에 날개를 달아줄 것이란 부담감 때문에 종이신문의 '현상유지'나 적극적이 아닌 '최소한의 참여' 정도가 시장의 정서가 되어 있는 셈이다.
종이신문들은 급한데 사회는 타 매체 이용률이 올라가면서 종이신문들과의 정서적인 거리가 워낙 먼 상태다. 잘 나가면서 왜 그리 서두르냐는 것이고, 서두르는 이유는 딴 데 있는 거 아니냐는 의구심인 거다.
결국 '종이'신문이 이뤄온 과거의 여론 독점에 대한 성공이 미래의 생존을 위협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부딪힌 것이다. 종이신문의 종사자들로서는 신문을 구성하는 수많은 콘텐츠 가운데 고작 20%의 내용 때문에 사업적 기반을 확대하려는 전략을 사회적 저항으로 인해 포기해야 한다면 이 역시 억울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통합 미디어 논의가 필요하다
사회가 심한 보혁 갈등을 겪고 있는 시점에 주요 대형 매체들의 성향이 보혁으로 갈리고 비즈니스적으로 중요한 시기임에도 이를 설득할 기반 역시 편향돼 있으니 어떤 식으로 바라봐도 종이신문의 변신은 환영받지 못할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종이매체라는 우물 안 강자, 장년층의 영향력 매체인 조선, 중앙, 동아 등 주요 신문의 경우 애매하게 됐다. 신속하게 다매체 포트폴리오를 완성하지 못하고 인터넷과 TV의 영향력 시장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사업적 기반 자체가 붕괴될 위기에 빠져 있는 것이다. 문제는 타 매체 시장을 키울수록 자신의 전통적인 영향력 기반인 '종이' 매체의 임종을 앞당겨야 하는 상황을 맞이해야 한다. 신문은 이제서야 그 상황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사회는 그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공중파 TV는 이미 영향력 시장의 강자다. 하지만 이들의 미래도 그리 밝은 것이 아니다. 미래를 준비해야 할 사양 산업 두 곳의 장벽을 허문다고 해서 일자리가 창출되고 투자가 활성화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산양 산업간의 벽이 허물어지면 기업 인수합병이 활성화되다가 결국 독과점 시장으로 흐르고 이는 다시 효율화란 명목으로 자원 재분배와 함께 일자리가 급격히 줄어드는 '고용없는 성장'이라는 막장 자본주의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이미 우리나라의 미디어 시장으 포화시장이다.
이런 상황에 여당은 정권창출을 도와준 신문에 뭔가 줘야 하는데 뭘 주어야 좋을지 모른다. 그래서 멍청하다는 것이다. 여당이 신문에 선물을 주려면 그 이상의 사회적인 선물을 내놓았어야 했다. 그래야 상호 호혜평등한 것처럼 시장에 신호를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표현의 자유를 대폭 신장시키고 시민저널리즘, 풀뿌리 저널리즘의 육성책을 도와야 했다. 또한 재벌이 들어올 길을 모색할 것이 아니라 미디어 기업들의 '경영'과 '편집권'의 분리에 대한 확실한 보증 위에 사적 자본의 미디어 기업에 대한 투자의 길을 폭넓게 허용해야 했다. 인터넷 규제를 강화하여 종이신문의 새로운 변신을 오히려 방해하면 안 된다. 자연스럽게 규제가 약한 인터넷으로의 이주를 도왔어야 했다.
지상파 시장은 이미 급속도로 매체별 시간 점유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전파당 매체수를 늘리면서도 반대로 방송에 사용되는 전파를 회수하여 새로운 무선 네트워크의 출현에 대비해야 했다. 지상파 방송 시장은 대규모 자본의 투입으로 인해 시장의 과점 선택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공중파를 무한경쟁시키겠다는 발상은 누구 머리에서 나왔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다.)
반면, 지금 상황에서 야당은 막연한 불안감만으로 미디어법을 '악법'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구호만을 남발하고 새로운 미디어 시대를 선도하는 혜안을 전혀 보여주지도 않았다. 프레임 경쟁에서도 끌려다니기만 하면서 말꼬리 잡기로 작게 성공했으나 대세에는 지장이 없는 상황을 만들어 버려 결국엔 졌다. 아니 여당이나 야당이나 모두 수준 이하의 논쟁으로 미디어 시장을 헤집어놓기만 했다. 이건 결국 '정권' 차원에서 미디어를 이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싸우는 100년 전 사고의 재판이 아니고 뭐겠는가. 진영논리로 풀 수 있는 사회적 합의는 단 한 건도 없다. 총체적으로 보든가 구체적인 사안별 접근이 필요했다.
새로운 미디어의 출현이 많아질 것으로 예측하면 오히려 미디어의 정의를 느슨하게 할 필요가 있다. 지나치게 구체화하다 보니 영역별 장벽이 생겨 지금과 같이 그 영역별 교류를 방해하는 문제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플랫폼이 열리면서 디지털 미디어 융합 현상 및 다매체화는 급속하게 진행될 것이고 반대로 미디어 영향력을 다시 쥐게 될 생산자 집단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드세질 것이다.
지금의 '미디어 악법 반대' 'TV 영향력 과점 해소' '신군부 미디어 체제 해체' '여론독점' 등의 구호만 난무하는 싸움이 우리나라의 미디어 시장을 건강하게 하지 않는다. 아무리 '정서의 영역'이라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정서적 구호만 난무한다.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미디어 시장' 또는 '언론 시장' 자체가 왜 국가 경쟁력에 도움이 되어야 하고 글로벌 미디어 그룹으로 성장시켜야 할 뚜렷한 이유가 있는가.
후기 산업사회 전략 논리를 미래 정보사회 전략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하니 정서적 괴리감만 생기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기존의 미디어 관계법을 모조리 폐지 및 통합 대상으로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최소한 1~3년 동안 통합 미디어법을 위한 고민을 해봐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급조되어 억지로 통과시킨 미디어법이 아니라 국민들 스스로가 미디어여도 납득이 될만한 민주주의 미디어 통합법이다.
2009/07/27 00:57
2009/07/27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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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w~ Alleh!!!
Tracked from IPR Professionalism 삭제니네 지금 촛불든다 파업한다 난리지?70%가 넘는 사람들이 반대한다고? 일주일 뒤에는 어떤 모습일까?누구는 출근하고 누구는 장사하고.오늘 있었던 부조리는 욕나오는 안주거리 하나로 치부되겠지. 오늘부터 딱 1년만 지나봐.오늘 일어난 일이 왜 못났는지는 점차 소멸되고.오늘 행해진 행태가 왜 잘났는지만 설치고 있을꺼야. 10년 후의 오늘의 모습은
2009/12/08 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