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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은 IMF 수혜자? 피해자?

2007/11/21 09:09

오늘이 IMF 구제 금융을 받아들이기로 발표한 지 꼭 10년째 되는 날이라죠?

그만도 10년 전을 생각하면 정말 아득합니다. 당시 97년말 4학년 선배(예비역)와 후배들이 졸업을 앞두고 거의 절망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졸업자 50여명 가운데 취업자가 2명이라뇨..ㅠ,.ㅠ 그것도 대부분 전공과 관련도 없는...

당시 대기업에서는 합격을 통보한 뒤 갑작스럽게 몇 달 동안 출근 명령을 내리지 않은 경우도 있었구요. 대기업 신입사원으로 합격한 '지원을 취소해달라'는 회사 측의 읍소에 눈물을 머금고 다른 곳을 알아보거나 끝까지 그 기업에 가겠다면서 무작정 기다리는 웃지못할 사연이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군대를 다녀와서 97년 3학년을 보냈고 4학년을 앞둔 상황에서 너무나 깜깜한 일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죠. 휴학 결정이나 1500원대의 살인적인 원달러환율 덕에 유학(어학 연수) 갔다가 중도포기하고 돌아오는 동료 학생들이 많았습니다.(처음에 800원대였다고 잘못 썼군요.. 쿨럭..) 거의 모든 대기업이 신입사원 시험을 축소하거나 폐지했으며 이 같은 상황은 언론사들이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대학 4학년이었던 98년의 암흑기를 지나면서 많은 학생들이 대학원에 진학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취업자보다 대학원 진학자가 더 많은 기현상을 목격하게 되었죠.

당시 그만의 가정 형편이 그리 넉넉치 않았습니다. 뭔가 해야 했죠. 그런데 넋놓고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는 상황이었구요. 그래서 시작한 일이 '생명보험회사 영업사원'(영업 관리가 아니라)이 되었습니다. 그만의 사회 첫 출발이었습니다.

이전에는 대졸사원들을 생명보험회사 지점의 사무관리직을 맡기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만이 들어간 회사는 당시 삼성생명의 남자 대졸자 영업조직의 선전에 자극받아 직접 영업자를 위한 직원을 모집했고 거기에 응시해 바로(?) 붙었습니다. 일정 기간 이수를 받고 보험설계사 시험도 통과했구요.

4학년 1학기 몇 달의 교육기간과 강남역 지점에서 시작된 영업사원의 한여름은 그렇게 지나갔죠. 평촌 분당 산본 등 신도시의 아줌마 영업 사원의 발이 못 미칠 것이라고 보이는 그곳을 찾아 소위 빌딩타기(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꼭대기 층에서 내린 다음 계단을 통해 각 층을 방문하며 영업하는 일)를 시작했습니다.

참담했죠. 정말 대학을 내가 왜 나왔나. 정말 이렇게 돈을 위해서 일하면서 내가 계속 이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회의가 들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많은 성장을 이뤘던 해였던 것 같습니다.

사무실에 들른 그만을 향해 손가락질 하며 '너, 뭐야? 자꾸 귀찮게 이런 것들이 들어오게 하나?'라며 어디인지 모를 곳에 소리를 지르는 것을 참고 들어야 했습니다. 경비원 아저씨들에게 떠밀려 건물을 쫓겨난 적은 너무 많죠. 브로셔를 사무실에 앉아 있는 새파란 사원에게 건내 주자마자 제 눈앞에서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구요. 한 장 더 놓아두었다가 버럭 화내는 것을 들어야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새벽녘에 출근해 각종 브로셔를 잔뜩 가방 속에 넣고 건물타기를 준비하러 나가다 보면 우연찮게 아주머니 보험 설계사들을 많이 만나게 되죠. 같은 내용의 브로셔를 전철 안에서 복습하면서 마주 앉아 있는 중년 아주머니 보험 설계사와 청년 보험 설계사의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하핫..^^

이들은 사회 첫발을 내딛은 신출내기가 봐도 정말 강호의 고수더군요. 1, 2억 연봉 영업 사원이 정말 가능하다는 것이 느껴지는 그들을 먼 발치에서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던 적도 많았죠.

지금은 이력서에 넣지 않는 그 짧은 보험설계사 시절, 세상을 향해 낮춰야 하는 방법을 배웠고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을 억지로라도 고쳐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반대로 이 길이 내 길이 아닐 때는 끌려가지 말아야겠다는 결심도 했죠.(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면 저는 보험설계사로서는 패배자였죠. 그렇게 어려웠던 당시에도 성공하는 보험설계사는 많았으니까요..^^ 적성이 안 맞았던 것도 있었구요. 보험설계사가 안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후 98년 중순 이후 잡지사 기자로 입사한 뒤 보험회사 동료로부터 뺨을 수차례 얻어맞았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당시 지점의 실적을 유지하기 위해 가족들 명의의 보험을 퇴사 이후에도 유지시켜야 한다는 불문율을 어기고 가족과 친구의 보험 계약이 해지되는 상황을 일부러 막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죠.

98년 절망의 IMF 구제 금융 시절에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출퇴근 하면서 매일 누구인지 모르는 노숙자들에게 천 원 한 장씩을 주면서 그 이상을 벌어야겠다며 자신을 컨트롤 하는 방식도 배웠습니다.

IMF 구제금융이 아니었다면 바로, 또는 재수나 삼수를 거쳐서라도 언론고시언론사 시험에 매달려야겠다는 결심을 했을텐데 당시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던 그만에게는 또 다른 방식의 삶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배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IMF 구제금융 시절을 혹독하고 잔인한 기억으로 갖고 있지만 좋은 배움의 시절로도 기억한답니다.

여러분의 IMF 구제금융 시절은 어땠나요?^^

이 글이 반응 좋으면 다음에는 엽기적인 잡지사 시절 이야기도 해볼께요~ㅋㅋ

** 전 국민이 저보다 훨씬 더 혹독한 시절을 보냈을텐데요. 이 당시부터 우리의 삼성 황태자님께서는 앉아서 주위 시종들이 알아서 갖다 바치는 계열사 지분을 챙기고 있었네요. 허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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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s

IMF, 구제금융, 보험설계사, 보험회사, 적성, 첫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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